아스떼까의 수도 떼노치띠뜰란과 이곳의 중앙신전 템쁠로 마요르. 신이 만든 도시 떼오띠와깐에서 시내로 돌아온 한국고대사목요윤독회 일행은 오늘날 멕시코시티가 생기기 이전에 이곳에 있었던 아스떼까 문명의 현장인 '뗌쁠로 마요르'(Templo Mayor) 유적을 찾아 도시의 중앙광장인 소깔로(Zocalo)를 찾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멕시코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된 이후 모든 도시의 중심에는 반드시 소깔로라는 광장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부쳐서 큰 성당과 시청사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어느 도시에서 여행자가 길을 잃으면 소깔로를 물어서 다시 방향을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뿐만아니라 모든 도시의 소깔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어서 자기 고장의 민속춤이나 놀이가 이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4백년 이상 멕시코의 역사를 지켜본 현장인 소깔로의 정치적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아직도 국가적인 기념식이 행해지는 멕시코의 상징 공간이다. 소깔로 옆에는 아스떼까의 유적, 뗌쁠로 마요르도 있어서 인디오의 문명, 스페인 식민지 시대, 현대의 멕시코 등 3시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마침 우리들이 멕시코시티의 소깔로를 찾았을때는 광장의 동쪽에 위치한 대통령궁 앞에서 백여명의 젊은 여성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살색 스타킹을 뒤집어쓰고 검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마치 비구니 스님이나 수녀를 연상케 하였다. 이 날 그들이 시위를 벌이는 목적은 여권신장을 외치는 것이었다.
'뗌쁠로 마요르' 유적은 현재의 대통령궁의 동북편에 있다. 이 유적은 아주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1913년 까떼드랄(대교회)의 뒤편에서 빌딩공사를 한창 진행하던 중 아스떼까 유적의 일부로 보이는 지하계단이 발견됐다. 당시는 방치되었다가 1979년에 상수도 공사를 위하여 땅을 파던 중에 무게가 8톤이나 되는 큰돌(석판)이 출토됐다. 이 석판은 1450년~15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아스떼까 신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달의 신 꼬욜샤우끼의 상으로 판명됐다. 발굴은 1984년에 완료, 일반에게 공개됐다.
'뗌쁠로 마요르' 유적은 아스떼까 왕국의 수도 떼노치띠뜰란의 중앙신전으로 밝혀졌다. 떼노치띠뜰란에는 신의 사자인 짜끄몰의 석상, 까엘의 제단, 뱀머리상, 사람 크기 만한 석상군 등 볼만한 석조물이 늘어서있다. 유적의 북쪽 광장에도 3개의 사당터를 볼 수 있으며, 중앙 제단의 한면에 해골조각이 되어있어서 더 눈길을 끈다.
유적의 동쪽에 위치한 뗌쁠로 마요르 박물관은 외형보다 전시공간이 넓었으며, 각 진열장의 유물 전시 솜씨는 우리나라 박물관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박물관의 중앙에 전시된 떼노치띠뜰란의 신전인 '콤플렉스'의 모형은 멕시코시티의 역사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 모형을 통해서 보면 대신전인 떼노치띠뜰란의 한 변이 약 500m이고 그 안에 크고 작은 신전이 78곳이나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스떼까인들이 텍스코코 호수의 늪지대에 정착한 것은 13세기부터였다. 식인독사가 우글거리는 버려진 늪지대에 도착한 아스떼까인들은 유목민 특유의 강인한 생존력으로 호수를 메꾸어 신전을 짓고 정착의 터전을 닦았다. 아스떼까인은 1324년에 호수 가운데 무인도에 정착하는데, 여기서 뱀을 잡은 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곳이 신이 내린 예언의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호수를 메꾸어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그곳이 나중에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가 되고 현 멕시코시티의 중심이 되었다. 뱀을 잡고 선인장에 앉은 독수리의 그림은 멕시코의 국장이다.
초기의 아스떼까 사회는 사회 계층이 발달하지 않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회였다. 초대왕(꿀와깐) 시절에는 강력한 떼빠네까 왕국의 용병으로 일했지만 4대왕(이쯔꼬아뜰)은 이웃인 떼슈꼬꼬, 뜰라꼬빤과 삼자 동맹을 맺어 떼빠네까의 폭군을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면서 일련의 개혁을 단행, 귀족의 권한이 강화됐고, 평민과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 삼자동맹의 맹주로서 아스떼까는 패권을 라틴아메리카 각지에 급속하게 넓혀 나갔는데, 6대왕(아샤야까뜰)은 이웃을 격파하고, 아스떼까족 전체를 직접 지배하에 넣는다. 스페인이 쳐들어왔을 때 아스떼까 제국의 영토는 베라끄루스주 북부에서 태평양 연안까지였다. 또 이때에 아스떼까의 수도였던 떼노치띠뜰란의 유적은 오늘날 멕시코 시티의 도시 밑에 묻혀있다.
아스떼까 제국은 신에게 산자를 바치는 인신공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많게는 한해에 2만명이 인신공양에 바쳐졌는데, 여기에 쓸 사람을 충당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전쟁 포로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합의하에 전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전쟁은 '꽃의 전쟁'으로 불렸다.
국립궁전은 멕시코시티의 소깔로 동쪽으로 길게 지어진 5층짜리 건물인데, 아스떼까 제국의 목떼수마 2세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꼬르떼스라는 정복자에 의해서 건물의 일부가 증축되었으며, 17세기에 한 차례 더 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국립궁전의 오른쪽인 대통령 집무실과 왼쪽의 재무부 청사를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 이 건물의 2층, 3층에는 건물의 벽면을 이용해서 멕시코의 혁명과정과 인디언들의 생활모습을 나타낸 리베라의 대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유명하다.
또한 국립궁전의 서쪽 건물에는 멕시코의 원주민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베니또 후아레스의 기념실이 꾸며져 있는데, 대통령의 집무실과 대통령이 쓰던 용품들이 복원, 정리되어 있었으며, 각종의 외교문서와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립궁전 정문의 윗 층에는 1810년에 이달고 신부가 멕시코 독립선언시에 타종했던 독립의 종이 걸려 있어서 오늘날에도 매년 9월 15일 밤에 독립기념일 행사를 할 때 현직 대통령이 국립궁전의 발코니에 서서 멕시코 만세를 외치면 궁전의 바깥 소깔로에 운집한 수많은 군중들이 따라서 만세를 외치는 행사가 거행된다. 국립궁전의 내벽 중앙에는 거대한 멕시코 혁명도(리베라)가 그려져 있고 건물의 동서 벽면 코너에는 그리스의 비너스상과 인도의 석가모니 상이 조각되어 있어서 이채로웠다.
글:이명식(대구대교수), 사진:최종만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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