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왜곡의 극치, 임나일본부설

지난 7월12일자 17면 '임나일본부의 허구를 파헤친다' 상편에서 언어학자 정연규교수는 '언어속에 투영된 한민족의 고대사'에서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에게 구다라(百濟)가 조공을 바치던 항구 다다라(大大良)와 다사(帶沙)는 일본사가들이 왜곡하듯이 경남 합천과 하동(韓多沙)이 아니라 일본 조도(長島)군에 있는 다다라(大多羅)임을 언어학적으로 풀이했다. 이를 좀더 자세하게 파헤쳐보자.

조도군의 가치향(勝鄕)에 있는 다다라가 '닛본쇼기'에 나오는 시라기(新羅)가 점유한 다다라였음은 거기에 작은 규모의 한국형 산성이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이 일대의 구릉지대에는 기비츠오카가라기(吉備津岡辛木)이라는 신사가 있다. 여기서 '가라기'는 '가라기'(韓城)으로 풀이되며, 산성이 있는 구릉지대를 '가라오'(韓尾)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돌담과 흙담자리가 남아있고, 큰돌을 쓴 횡혈식 돌간 무덤도 있다.

'환단고기'(桓檀古紀)에서 임나는 서북계에 있는데, 북에는 바다로 막혀있다. 국미성(國尾城)에서 통치했다고쓰여져있다. 여기서 국미를 일본 고대어로 구미오라고 하며, 이 지명은 대마도 서북쪽의 가리오(狩尾)에 비정된다고 사학자 이병선은 주장하고 있다. "가리오라는 지명이 대마도, 기비(吉備)에도 있는 것을 볼 때, 가라 사람들이 이동과 동시에 지명도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정교수는 밝힌다.

기비 지방의 다다라벌의 뒤에 솟은 게시코산(芥子山, 2328m)을 고대 일본에서는 가라고산(韓子山)이라고 불렀다. 겨자 개(芥)의 일본 음이 '가라시'인데, 이 '가라'는 매울 신(辛)자를 쓰기도 한다. 야마토 정권이 파견한 병사들이 2~3년이나 임나에 머물면서 임나의 여자들에게 장가들어 아이를 낳았다. 이렇게 야마토의 남자와 임나의 여자사이에 생긴 아이를 '가라코'(韓子)라고 불렀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 조도 가치향에 있는 다다라벌이라는 지명과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라코산이라고 부른 점, 가리오에 있는 가라기산성, 닛본쇼기의 계체기(繼體紀)의 기사내용을 종합해보면 일본 기비 지방 조도가 바로 임나가라(任那加羅)가 있었던 곳이라고 정교수는 못박는다.

하지만 일본의 분위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정반대로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곡필을 마다하지 않으며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동해 바다에서 먹고버린 라면 봉지가 파도를 타고 그대로 건너가 닿는 곳인 일본 시마네현에 수년전에 출장갔을 때의 실화 한토막.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가니 벽에 왠 그림이 붙어있었는데 동행했던 일본 공무원은 일본의 신공왕후가 신라를 쳐서 신라땅을 자기네 영토로 끌어들이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왜곡을 일본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인양 조직적으로 세뇌하고 있고, 한국 침략의 근거로 혹은 역사교과서 왜곡의 밑둥치로 삼는 터무니없는 일을 거듭하고 있다.

'닛본쇼기'에 의하면 '주아이(仲哀) 9년 2월에 주아이왕이 구슈(九州)의 구마소(熊襲)족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그의 비(妃)인 신공왕후가 같은해 9월에 제국에 영을 내려 선박을 모우고 10월에 친히 시라기(新羅)를 정벌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닛본쇼기에 시라기 정벌 연대를 서기 20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일본이 통일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3~4세기 전의 일이어서 맞지 않는다. 역사상 일본이라는 국호와 천황 칭호가 생긴 것이 6세기 말에서 7세기 경이었다.

'삼국사기'에도 일본 국호가 생긴 것이 신라 문무왕 10년 즉 서기 670년이라고 쓰여있다. '삼국사기'에서 서기 200년은 나해니사금(奈解王) 5년에 해당되는데, 그해 신라에서는 7월 한낮에 서리가 내려 풀이 말랐고, 9월에 일식이 있었고, 왕이 친히 알천변에서 열병을 하였다는 사실의 기사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닛본쇼기에서 신공왕후가 시라기를 정벌할 때의 장면은 단순히 이렇게 적혀있다.

"왕후가 가사히우라(악日浦)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동 10월3일에 와니쓰(和珥津)를 출발, 시라기에 도착했다. 시라기 왕이 백기를 들고 나와서 엎드려 춘추로 조공하겠고 약속했고, 구다라(百濟)와 고마(高句麗)의 국왕도 군세를 보고 놀라 항복하고 조공할 것을 약속했다...". 여기서 일본 사가들은이 시라기를 경주의 신라라 억지로 끌어붙이고, 역사를 날조하고 있다.

또한번 더 따져보자. 위 닛본쇼기의 '가사히우라'는 주아이왕의 궁이 있는 기타구슈의 지명이다. 다음으로 신공왕후의 배가 출발했다는 '와니쓰'는 어디인가. 일본 고대어에서 큰배를 '와니'라고 하는데, 위의 '와니쓰'는 큰배를 정박하는 나루란 뜻이어서 일본내에서 '와니쓰'란 지명이 여러곳에 분포하고 있다. 고로 신공왕후가 발선한 '와니쓰'는 기타구슈에 있던 지명가운데 한곳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공왕후가 정벌한 시라기는 일본 쓰시마(對馬島)와 사고(佐護)에 있었던 시라기이지 결코 경주 신라가 아니다.

그럼 신공왕후는 누구인가. 신공왕후의 본명은 '오기나가다라쓰히메미코도'(息長帶比賣命)이며 그 형태소는 오+기+나가+다라-쓰+히메+미코도이다. 이 미코도는 미+코도로 분석되는데 이 미코도의 미는 존칭사이다. 따라서 코도가 원래의 말로 코도는 한국말의 어른을 나타내는 '장'(長)에 해당된다. 다음은 히메를 보자. 일본 상대에서는 남자에 대한 미칭으로 히코(彦), 여자에 대한 미칭으로 히메(姬)를 많이 쓴다. 또 다라쓰라는 형태소를 보자. 다라쓰는 신라 건국시에 소벌도리(蘇伐都利)의 도리와 같은 어사로서 다라쓰, 다라사, 다리, 도리는 같은 것이며 쓰나 사는 어말에서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보통 다리는 일본의 왕의 이름에 쓰인다. 다음에는 나가를 보자. 나가는 일본어 '中'을 뜻하며, 국왕은 항상 중토(中土)에서 정사를 본다. 기는 성城을 뜻하며, 支己등과 같은 어사이다. 오는 일본어로 大를 뜻한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신공왕후를 일컫는 오기나가다라쓰히메미코도는 대성의 중토에서 정무를 보는 여자 미코도이다.

최미화 기자 magohalmi@imaeil.com

일본사람들에게 신격화되어있는 일본의 신공왕후는 규슈(九州)에 있었던 왜로서 쓰시마의 시라기(新羅)를 정벌한 것이지 경주의 신라(新羅)를 정벌한 것이 아니었고, 일본 학자들이 임나를 김해 고령 함안 일대의 가야지역으로 비정한 것은 사실이 아님은 대마도에서 편찬된 '대주편년략'(對州編年略)에서도 나타난다.

대주편년략의 '산가요약기'(山家要略紀)에서 대마도는 고려국의 목(牧, 다스리는 곳이라는 뜻)이요, 新羅(시라기)가 있던 곳이다. 開化천황대부터 이 섬으로부터 습격해왔으므로, 주아이천황이 豊浦궁으로부터 대마도에 나가서 新羅(시라기)를 정벌하여 마침내 이 섬을 빼앗았다고 쓰여있다. 따라서 신라정벌설의 新羅는 경주 신라가 아니라 대마도 시라기이며, 이를 한반도내로 억지 비정하는 것은 한국강점에 대한 명분찾기에 다름아니다.

'언어속에 투영된 한민족의 고대사' 집필을 통해 역사왜곡의 근거가 된 임나(任那)가 고대 한반도 가야지방이 아니라 일본 쓰시마(對馬島), 기비(吉備)에 있었던 한국계 읍락국이었음을 고대 언어 분석을 통해 추적한 언어학자 정연규(전 경북대, 한국외대교수)씨는 일본인들이 신이 내린 물건(神物)으로 여기는 칠지도의 명문도 임나일본부를 왜곡해석하는데 동원되었다고 주장한다.

칠지도(七支刀, 사진)는 일본 나라(奈良)현 텐리(天理)시 이소노가미신궁에 보관돼 있는데 칼날에서 좌우로 각각 가지칼이 세가지씩 뻗어있어 도합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다. 닛본쇼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기사에 나오는 칠지도에는 모두 60여자가 새겨져있고, 새겨진 글자의 외곽에 금(金)선이 둘려져 있다. 칠지도가 일본 역사왜곡의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의 견강부회식 해석에서 비롯된다.

신공기 52년조는 이렇다. '百濟가 칠지도와 칠자경을 비롯한 각종 귀한 보물들을 가져왔다'. 이를 일본은 여기에 나오는 백제가 마치 삼국시대 백제인 것처럼 주장하면서, 한반도의 백제가 칠지도를 헌상한 것처럼 왜곡해석하고 있다.

이미 상편(7월12일). 중편(7월18일)에서 보았듯이 닛본쇼기에 나오는 百濟는 삼국의 백제가 아니라 일본내 한국계 읍락 구다라(百濟)이며, 또한 왜왕으로 책봉된 백제의 왕세자가 일본의 신공황후에게 칠지도를 헌상한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에게 지침을 주는 내용을 담은 하사품이라고 정교수는 주장한다.

독자들의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는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이고, 괄호안의 (?)는 문맥상 이 글자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한면) '泰和 四年 ?月 十六日 丙年 正陽造 百鍊七支刀

피百兵 宣供供 侯王 奇???

(다른면)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王?)世(자?)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즉 '태화 4년 9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侯)왕 기(奇?)께 바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 (백자는 백제) 왕세자 기(奇)가 태어나니 성상은 말씀하시어 (奇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마지막에 보이는 '傳示後世'를 풀어보면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이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훈계조의 글을 담고 있는 이 칼을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에게 헌납했다면 앞뒤가 맞지않는다. 명문추적에 이어서 칠지도를 둘러싼 의혹은 또 있다. 오랫동안 비장돼오던 칠지도를 처음으로 판독한 사람은 이노가미신궁의 대궁사 간마사도모. 간마사도모는 오랫동안 비장돼오던 칠지도의 녹을 벗겨내고 칠지도에 씌여진 명문을 판독했는데, 칠지도의 명문 가운데 10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혹자들은 명문을 판독한 간마사도모가 일본측에 불리한 명문의 일부 글자를 삭제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마사도모의 증손자가 가지고 있었던 칠지도에서 벗겨낸 녹의 양이 많았다는 것인데, 구석기 역사까지 날조하는 일본인들이 자기네 역사에서 불리한 칼날의 몇글자쯤이야...

최미화 기자 magohalm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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