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파트단지 텃밭

아파트와 텃밭. 삭막한 회색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내에 파릇파릇 상추가 소복한 텃밭이 있으면 어떨까. 아파트 주차난을 가중시키는 애물단지, 아니면 바쁜 일상 속에서 방치돼 황폐해진 쓸모없는 공간일 뿐일까.

텃밭 가꾸기에 흠뻑 빠진 대구 침산2차 화성타운 주민들은 도심에서 흙을 밟으며 채소를 가꿀 수도 있고 이웃간에 대화도 자연스레 나눌 수 있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좋은 공간이라고 했다.

노인들에겐 좋은 친구가 되고 아이들에겐 자연체험학습장도 된다는 것. 또 흙냄새가 그리워 주말농장을 찾아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텃밭은 도시민들이 자연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돼 시민정서를 회복하고, 나비 등 곤충들을 불러들여 도시에 자연을 연출할 수 있게 한다.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대도시에 '동네정원'을 법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와, 달팽이다".

13일 오후 대구시 북구 침산동 침산2차 화성타운 내 텃밭. 아파트 입구 관리사무소 뒤쪽에 자리잡은 200평 정도의 텃밭에서 한 아이가 달팽이를 발견하고 외쳤다.

두마리였다.

아이는 신기한 듯 손에 곱게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레 놓아주었다.

텃밭 한쪽에선 아주머니들이 배추를 다듬고 있었고 한 새댁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한 아저씨는 아예 흰고무신을 신고 바지까지 둥둥 걷어올리고 연신 땀을 훔치며 고추 모종을 심고 있었다.

이 텃밭엔 상추, 배추, 고추, 쑥갓, 파, 들깨 등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는 채소는 다 있다.

주민들은 각기 분양받은 2평 남짓되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 서로 도와가며 온갖 채소를 정성스레 가꾸고 있다고 했다.

텃밭에서 만난 김기연(55)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곳에 나와 물을 주고 채소를 가꾼다고 했다.

김씨는 처음엔 농사를 지을지 몰라 실패를 거듭하다 시골에 가서 농사법을 배워오기까지 했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주민 중 최고 농사꾼이라고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대신 자랑을 했다.

날씨가 시원해지기 시작하는 오후 6시쯤 되면 주민들이 하나둘 물뿌리개와 호미를 손에 쥐고 텃밭으로 나온다고 했다.

김씨는 "텃밭을 분양받은 사람이건 아니건 관계없이 여유롭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연 사랑방"이라며 "보는 것 만으로도 여유로워진다"고 자랑했다.

이순옥(79) 할머니도 텃밭이 있어 소일거리도 되고 집에서 먹을 각종 채소를 직접 키울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먹을거리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직접 무공해 채소를 키워 먹다보니 잠도 잘 오고 소화도 잘 되는 등 더욱 건강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텃밭을 가꾸다보면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되고 무엇보다 이웃들과 친해질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텃밭은 또 아이들에겐 좋은 생태학습 교육장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직접 채소를 가꾸면서 이름도 익히고 생명의 소중함도 알게 된다는 것. 김영자(43·여)씨는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과 매일 여기에 와서 달팽이도 잡고 곤충도 관찰하는 등 교육효과가 커 매년 텃밭 분양 신청을 한다"며 "부모와 함께 나온 아이들끼리 어울려 마음껏 놀 수 있는 자연 놀이터이기도 하다"고 했다.

또 텃밭은 아들의 일기 소재이자 자랑거리라는 것.

김씨는 "아들과 함께 온갖 사랑과 애정을 다 쏟은 탓인지 채소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보면 설레기까지 한다"며 "얼마나 컸는지 궁금해 매일 나오지 않을 수 없고 비가 와도 걱정돼 나와봐야 안심이 될 정도"라고 했다.

2평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수확량은 만만찮다.

한 가족이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때문에 친척 및 이웃들에게 나눠주며 정을 내거나 아예 수확한 상추를 핑계로 이웃과 함께 신천 둔치나 집에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경우도 적잖다고 했다.

텃밭이 계기가 돼 '정기 모임'까지 갖게된 주민들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최일화(49·여)씨는 "여러 가족이 모여 재배한 채소로 쌈 싸먹고 무쳐 먹으며 술 한잔 마시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며 "김장을 담글 때도 텃밭에서 키운 배추와 무를 뽑아 함께 모여 담그고 나누면 그날이 바로 동네 잔칫날"이라고 했다.

이 아파트에서 텃밭을 가꾸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99년 입주때부터라고 했다.

주민들의 호응이 커 지금도 신청을 받아 밭을 분양할 정도라는 것. 분양 대상은 488가구 중 80가구. '텃밭을 가꾸지 못한 가구'나 '나이가 많은 주민'에게 우선권을 준다.

텃밭 분양 기간은 1년. 보통 2월에 신청을 받아 3월부터 겨울이 오기전인 11월 정도까지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이 아파트 김영규 관리사무소장은 "해질 무렵 수십명의 주민들이 저마다 물뿌리개와 호미를 들고 물을 주고 밭을 가꾸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며 "간혹 소음이나 주차공간 등 텃밭과 관련된 민원이 생길 법도 하지만 대부분 텃밭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 그런지 아직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다.

이호준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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