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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훌훌 떨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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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가 울리고 역동적인 무용을 선보이는 공연단이 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2003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 개막식은 하이라이트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축하공연을 지켜보던 한 소년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한마디 흘렸다.

"그 사람들도 다 같이 보면 좋았을 텐데"

대구 남산초교 5학년 김지섭(12)군. 테니스선수인 지섭이는 고향인 상주를 떠나 혼자 대구에서 테니스 유학 중이다.

이번 U대회에는 테니스경기 볼보이 자원봉사자로 참가하고 있다.

지섭이가 말하는 '그 사람들'은 지난 2월 지하철 참사로 숨진 희생자 192명. 겨울방학을 맞아 상주 집에 다녀온 지섭이는 참사가 나던 날 대구역에서 악몽의 지하철 1080호를 탔다.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도착하는 순간 자욱한 연기 속에 위험을 직감했다.

문이 열리자 누군지도 모르는 한 어른의 옷을 부여잡고 마구 뛰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달렸다.

넘어지고 엎어지길 수차례. 이윽고 밝은 빛이 보였고, 숨을 쉴 수 있었다.

"나쁜 꿈을 여러번 꿨어요. 아무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혼자 헤매는 꿈. 너무 무서워서 울음도 나오지 않았어요".

U대회 개막식은 전세계 젊은이들의 축제인 동시에 대구시민들에겐 한마당 살풀이였다.

어린 지섭이도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 저 깊이 남은 그 날의 아픔을 이젠 털어버릴 때라고 느끼는 듯 했다.

안드레 애거시 같은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를 꿈꾸는 지섭이. 라켓을 잡은 지 6개월 만에 전국대회 대구예선전 8강에 들만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

뙤약볕 아래 볼보이 연습을 하느라 셔츠는 금방 물에서 건져낸 듯 푹 젖어있고, 목덜미엔 말라붙은 소금기가 하얀 줄을 긋고 있지만 뭐가 즐거운 지 싱글벙글이다.

"훌륭한 선수의 경기를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잖아요. 이제 대구에도 지하철 사고 같은 마음 아픈 일없이 U대회처럼 즐거운 일만 계속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들도 하늘나라에서 보고 있을 테니까".

개회식이 끝난 뒤 경기장을 나오던 지섭이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도 이제 나쁜 꿈은 그만 꾸고 멋진 개막식 꿈을 꿀거예요. 친구들한테도 자랑하고".

김수용기자 ksy@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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