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편지-묻지 마 의대, 꿈을 잃은 학교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그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히 여기겠노라.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저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시작과 끝 부분이다.

여기서도 나타나듯 의사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와 함께 의사에게는 자신의 분야와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정신, 우둔하면서도 끈기 있는 집중력 등이 요구된다.

여기에 강인한 체력이 더해져야 비로소 의사가 될 적성을 갖췄다고 현직 의사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요즘 의사 지망생, 구체적으로 얘기해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고교생들이 과연 이같은 적성들을 갖추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지극히 회의적이다.

차라리 벌이가 좋고 안정적인 직업인으로서 의사를 선택하고 있지 않나 하는 게 솔직할 것이다.

올해도 대구의 상위권 수험생들 사이엔 이른바 '묻지 마 의대' 열풍이 거셌다.

지난해 입시에서 의대, 치대, 한의대에 진학한 대구 수험생은 모두 303명으로 서울대 합격자 284명을 넘었다.

전국의 의대, 치대, 한의대 정원 2천276명의 13.3%를 차지했다.

대구 수험생 비율이 전국의 5.7%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정확한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올해는 이보다 더 많은 의대 진학자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대구 수험생들의 성적은 지난해보다 더 나은데 서울대 합격자(1차)는 240여명으로 되레 줄어든 것이다.

대구 수험생들의 의대 선호가 높아진 이유로는 IMF 이후 붕괴된 지역의 경제 여건이 가장 먼저 꼽힌다.

서울대 간판이나 종래 경상도 사람들의 관료.권력 지향성이 실리적으로 돌아섰음을 보여준다.

학부모들은 이제 '공급 과잉'이 멀지 않았다는 경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의사가 되면 먹고사는 걱정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들이다

이 같은 '묻지 마 의대' 현상의 문제점을 여기서 다시 왈가왈부하자는 건 아니다.

짚어보고 싶은 것은 우리의 학교 교육이다.

올해로 초.중.고 전 학년에 걸쳐 적용되는 7차 교육과정은 일찍부터 학생 개개인의 소질과 특기, 적성을 발견해 집중적으로 길러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확한 적성 파악과 적절한 진로 지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 개개인에게 가장 맞는,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꿈을 찾아내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학교 단위 진로 교육은 교육과정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형식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고교의 적성검사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교사들에겐 학생들의 적성을 파악해내고 개인별로 지도할 시간도, 여건도 마땅치 않다.

의지마저 불투명하다.

학부모들은 잘 먹고 잘 사는 직업에 최고의 가치를 둔다

이런 속에서 우리 학생들의 꿈이 온전히 피어날 리 없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성취의 과정과 남다른 결실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며칠 전 의대에 합격했다는 한 고3생에게 "왜 의대에 갔느냐"고 물었더니 "의사가 되려고요"라고 답했다.

왜 의사가 되려느냐고 다시 물었더니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에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바란 건 아니지만 혹시나 "꿈이 의사거든요"라는 대답이라도 들었으면 했던 기대는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다.

김재경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