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나물캐기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다.

먼지 풀썩이던 땅이 모처럼 촉촉히 젖어들어 환호성이 터져나오는 듯 하다.

새들거리던 밭작물들이 생기를 되찾고, 양지녘엔 봄나물들이 여린 얼굴을 쏘옥쏘옥 내민다.

사람이 제아무리 때를 맞춰 열심히 물을 준들 하늘에서 한바탕 내리는 빗물에는 발꿈치조차 따라가지 못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또한 생명체의 시작은 흙이며, 흙을 안고 있는 저 대지는 모든 생명체의 자궁임도.

봄이 가까운 요즘, 들녘에서는 월동 병충해 방제를 위해 논두렁.밭두렁을 태우느라 한창이다.

점점이 새파란 보리밭 외엔 텅 비다시피한 들판에서 보랏빛 연기가 한가롭게 피어오르는 광경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거뭇거뭇 타버린 자리는 개구쟁이 녀석들의 머리 헌데자국 같아 미소를 머금게 한다.

희한한 건 발갛게 들불이 지나간 자리에도 얼마 안있어 새싹들이 지천으로 돋아난다는 것이다.

땅속까진 그다지 뜨겁지 않은걸까. 설령 그렇다해도 그 연하디 연한 것들이 불길이 덮친 자리에서 "나 아무렇지 않아요"라는 듯 고개를 쏙 내미는 것이 여간 경이롭지 않다.

저것들은 저리도 끈질기게 살려 하는데 우리는 왜 학교성적 나쁘다고, 가난이 지긋지긋하다고, 카드빚의 무게에 짓눌려 살 수 없다고, 제 목숨들을 그리 쉽게 버리는걸까.

찬 기운이 남아있긴 하지만 볕살은 제법 도탑다.

부지런한 이들은 벌써부터 봄나물 캐느라 하루가 짧다.

논두렁.밭두렁에서는 쑥을, 묵정밭에서는 냉이를, 그리고 과수원 기슭이나 밭 둔덕의 잔 돌이 섞인 곳에서는 달래가 저마다 무리지어 있다.

푸성귀가 귀하던 지난 시절엔 아이들도 학교가 파하면 책보따리 던지기 무섭게 나물캐러 나섰다.

빈 바구니가 조금씩 차는 재미에 얇은 옷 사이로 허리가 쑥 삐어져 나오는 것도 모른채 어둑할때까지 들을 누볐다.

통통하게 살찐 달래, 길다란 냉이 뿌리를 다치지 않게 온전히 캐냈을 때의 그 충일하던 기쁨이란….

영등할매(음력 2월 초하루에 와서 보름에 나간다는 바람의 신. 한해 농사를 관장한다고 믿음)에게 나물 많이 뜯게 해달라고 비는 의령의 구전민요는 나물캐는 이의 심정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도씨(영등할매) 할마씨/ 내 나물 광주리 불아주소/ 자네 딸 시집갈 때/ 농 두 바리 궤 두 바리/ 코리(고리: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로 만든 상자) 닷죽 실리 주께'.

비록 잘 먹고 잘 입지는 못했어도 그 시절 아이들은 나물캐기를 통해 향기로운 대지에 대한 감사와 작은 것들로 인한 기쁨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다.

아기때부터 명품족으로 자라나고 원하는 것은 뭐든 얻을 수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나물뜯기를 체험케 해보면 어떨는지.

전경옥 편집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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