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트라팔가 광장을 거닐면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물리친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광장 한 가운데 있는 넬슨 동상은 온통 비둘기 똥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눈만은 부릅뜨고 있다.
런던 시민이 가장 즐겨찾는 광장임은 말할 나위없다.
산책하면서도 가슴 뿌듯한 역사적 자부심을 '덤'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 콩코드 광장에는 지금도 단두대에서 사라진 루이 16세와 왕비 앙트와네트의 혈흔이 뚝뚝 묻어있는 것 같다.
세계사를 뒤흔든 시민혁명을 주도했던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이 서려있는 곳이다.
'화합'과 '일치 단결'이라는 뜻의 콩코드 광장이 주는 이름에서 우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자연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성이 담긴 지명은 이렇게 심금을 울린다.
그래서 웬만한 역사적 꼬투리라도 있으면 거기에 억지로라도 꿰맞춰 이름짓는 것이 세계적 추세다.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문호 괴테가 앉았던 의자까지 '괴테의 의자'라는 제목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에펠탑 바로 밑에 있는 레스토랑은 에펠탑 건립을 반대했던 모파상이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곳은 이곳 뿐"이라며 자주 들렀다고 해서 일약 유명해졌다
무대를 대구로 돌려보자. 흔히 대구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내세울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내세우지 못한 후손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헐릴 뻔하다 겨우 보존 쪽으로 가닥을 잡은 중구 계산동의 이상화(李尙火) 시인 생가를 보면 너무 푸대접이다.
상화 시인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손잡고 만세 운동을 일으킨 우리나라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며 지금은 잃어버린 남의 땅이지만 언젠가 돌아올 봄을 그토록 갈망한 분이 아니던가. 물론 생가 복원도 좋다.
그러나 근처 골목길을 거닐면서 상화의 시가 자연스레 떠오르도록 역사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더 시급하지 않은가. 지금 묘가 있는 대곡동에 '상화로'가 있는만큼 생가 쪽 골목은 '마돈나로' 정도로 해서라도 시인의 정신을 곱살려야 한다.
또 있다.
이육사(李陸史)다.
광야에서 매화 향기를 그리며 목놓아 울던 애국 시인, 출생지는 비록 안동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대구형무소를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삼덕교회 부근이 되겠는데 바로 그 형무소 수감번호가 264번, 그래서 이름도 이육사가 아니었던가.
육사의 혼은 대구에서 더 처절하게 꽃핀 셈이다.
육사로(路)를 만들어야 할 이유다.
건덕지가 없어 못 만드는 판국에 세계적인 호재(好材)를 갖고도 이용할 줄 모른다는 핀잔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빙허(憑虛) 현진건로도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한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주인 위암(韋庵) 장지연선생도 대구에서 신문 발행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있는만큼 확인이 되면 인쇄골목은 당연히 '장지연로'가 돼야할 것이다.
경기도 부천시는 아름다운 거리 이름을 갖고있기로 유명하다.
먼저 주식회사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柳一韓) 선생을 기린 유일한로(路)가 있다.
유 선생은 지금 한창 떠들고있는 '종업원지주제'를 일제 때 이미 실시한 분이다.
69년 은퇴하면서 혈연 관계가 전혀없는 전문경영인에게 사장직을 물려주었고 개인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선진 자본주의에서도 보기 힘든 기업가 정신을 앞서 실천한 분이 아닌가. 지금 유한 대학 앞을 지나는 국도인 경인로까지 '유일한로'로 하겠다며 부천시와 서울시가 머리를 싸매고 있다.
이밖에 펄벅 여사가 활동했던 곳은 펄벅로, '논개'의 시인 변영로의 호를 딴 수주(樹州)로는 교육적인 효과를 톡톡히 지니고 있다.
욕심이 과했던지 부천시와 연고도 없는 역사 인물까지 온통 등장시켜 놓았다.
원효로, 율곡로, 추사로, 청마로, 윤관로, 강감찬로에다 다산로의 경우 1~7로까지 있다.
억지 같지만 부천시 지명(地名)위원회에서 인명을 도로명칭 우선 순위 1번으로 정해놓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역사성을 부여하려는 지방정부의 노력에 수긍이 간다.
바야흐로 지방화 시대, 이제 역사에서부터 대구의 혼을 찾아야 할 때다.
이 분들의 이름을 국어 교과서에서나 만나 봬서야 어디 후손으로서 체면이 서겠는가. 그 분들의 이름이 시민들의 곁에서 매일같이 인구에 회자되기를 기대해본다.
윤주태(논설위원)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