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을 하루 앞둔 지난 4일. 전북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방향으로 차를 몰고 나섰다.
동장군이 심술이 났나…. 전날 내린 눈으로 산속은 아직도 한겨울이었다.
하지만 봄의 숨결은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앙상한 가지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새순. 그 밑으로 철철 흐르는 계곡 물 소리가 도심에 찌든 마음의 더께를 후련하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무주리조트 입구. 스키 장비들을 진열해 놓고 막바지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가게들을 지나 한 식당 간판이 보였다.
'홍성가든'. 겉보기에 여느 식당과 다름이 없어 보이는 식당 안 마당으로 들어서니 진풍경이 펼쳐졌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재래식 장독. 어른 두명이 팔을 뻗어도 모자랄 만큼 큰 독에서부터 아담한 크기의 작은 독에 이르기까지 장독 200여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어제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오늘 장을 못 담글 줄 알았다니까…. 날씨도 추운데 어여 끝내자고…".
두껍게 옷을 껴입은 마을 아낙네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그러고 보니 이날은 장 담그기에 좋다는 말(馬)날이었다.
"옛날부터 말날에 장을 담그면 액이 끼지 않는다고 했지. 장을 담그는데도 다 어른이 있어. 큰 장부터 해놔야 고추장, 막장도 담그는 거지".
이곳에서는 전통 방식으로 장을 담그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장 맛이 좋기로 소문나 있는 데다 장 담그는 양도 엄청나게 많았다.
이날 장을 담그는데 들어간 콩은 무려 60가마. 지난해 가을 직접 재배해 수확한 햇콩을 장작불을 피워 가마솥에 삶아 찧어 네모나게 메주 모양을 잡는데만 10일이 더 걸렸다.
이곳에서는 장을 담그는데 고로쇠 수액을 넣는 것이 특이했다.
잘 띄운 메주를 깨끗이 씻어 큰 독에 차곡 차곡 넣은 뒤 채에 거른 고로쇠 소금물을 붓는 것이었다.
"이곳은 해발이 높아 고로쇠 수액이 당도가 높지. 몸에 좋고 물 맛 좋은 고로쇠 수액으로 장을 담그니 장이 더 맛있을 수밖에…".
고로쇠 수액을 부어 잘 섞은 소금물에 계란을 띄우니 동전 크기만큼 동동 위로 떠올랐다.
옛날부터 소금물의 농도는 이렇게 계란을 띄워 맞췄다고 한다.
메주를 넣은 독 안에 소금물을 붓고 잡귀가 끼지 말라고 숯과 잘 마른 붉은고추를 띄웠다.
"맛있는 장을 얻어 먹으려면 조금이라도 일손을 거들어야지".
장독을 깨끗이 닦으며 마무리를 하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안주인 문상옥(53)씨가 점심이라도 드시고 가라며 따뜻한 방안을 권했다.
"손맛도 좋지만 마음도 얼마나 고운지 몰라. 할머니들이 빙판길에 넘어져 뼈라도 부러지면 어쩌려느냐고 빈 방을 내줘 뜨끈뜨끈하게 기름 때주지, 먹을 것 갖다 주지 정말 이번 겨울을 편하게 보냈다니까…".
김순내(75) 할머니의 칭찬이 늘어졌다.
마을 근처에 노인정이 있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행여 다칠세라 빈 방을 내준 문씨의 마음 씀씀이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해주는 것 아무것도 없어…".
처음 보는 이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쓰며 정을 내는 문씨는 이곳에서 보통 3월 한달만 채취할 수 있는 고로쇠 끝물로 고추장과 막장을 담그면 올해 가장 큰 일을 마치는 셈이라고 했다.
"옛날에 큰 병이 어디 있었어. 폐병이 가장 컸지. 요즘 음식은 농약, 조미료 구더기야. 그래서 암 등 이상한 병이 생기는 거야"
김천 남평 문씨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가 음식을 만드는 것을 어려서부터 눈여겨 배웠던 문씨는 식당을 운영해도 조미료는 아예 쓰지 않는다.
농약을 치지 않은 채소 등을 직접 재배해 내놓는다.
문씨는 김장도 매년 3천 포기를 담근다.
해마다 11월 25일이 되면 가을에 농약 안 치고 재배한 배추로 김장을 담근다.
"여름 배추는 농약을 많이 치기 때문에 먹으면 안돼".
문씨는 1년동안 먹을 김치를 한꺼번에 담가 저장고에 넣어둔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한여름에도 시원한 동치미와 백김치를 내놓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얼마전 무주군에서 아까운 솜씨를 죽이지 말라며 반딧불이가 사는 청정지역의 지명을 따 '반딧불 김치, 된장, 고추장, 막장' 상표까지 내줬단다.
지난해에 담근 고추장 단지 뚜껑을 여니 신기하게도 하얀 '꽃'이 피어있었다.
이렇게 공기 좋은 곳에서 '꽃'이 피는 고추장을 도시로 가져가 냉장고에 넣지 않으면 상한 것처럼 끓어오르는 게 정상이라고 한다.
"우리의 전통 음식을 되살려야 해. 그게 바로 건강해지는 지름길이지".
도시로 나가 식당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는 사람이 많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는 문씨. 전통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도시인들을 딱 2천명만 회원제로 모아 1년동안 먹을 간장, 된장, 고추장, 막장, 김치를 대주면 좋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2천명을 넘으면 안된다고 고집했다.
"음식 맛이 너무 알려져도 좋을 게 없어. 그러면 제 맛을 잃게 될 염려가 있거든".
불안한 먹을거리에 대한 걱정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그녀가 종갓집의 전통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가 될 듯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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