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국가 원로가 왜 없나

4년 전 미국대통령선거때 당시 집권민주당의 '고어'와 공화당의 '부시'는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고 승패의 관건은 플로리다주(州)의 선거인단 25명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달렸었다.

최종 투표집계결과 900여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부시가 승리했다.

이에 '고어'는 총투표자의 0.5%이하의 표차는 재검표할 수 있다는 플로리다주(州)법에 근거, 재검표를 요청했고 이게 주 대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져 우선 3개 카운티의 재검표를 하는 과정에서 표차가 500여표로 줄어들면서 투표기의 결함이 발견됐다.

이른바 '보조개'표라 이름붙여진 '펀치'가 기표에 구멍을 뚫지 못하고 흔적만 남아 컴퓨터가 이를 인식못해 무효처리된게 무려 수만매, 게다가 개표시한내에 도착못해 최종집계에서 누락된 부재자투표 등등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미국의 투표전반의 하자가 속속 드러났고, 법적인 해결과제로 등장했다.

더욱이 이 플로리다주는 민주당의 텃밭이라 '고어'측에서 전면재검표를 주장했고 '부시'측에선 위헌 내지 불법이라면서 이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법정 공방전은 무려 35일간에 걸쳐 주(州) 대법원과 연방대법원간을 오가며 희비가 엇갈리다 결국 연방대법원의 '재검표는 위헌'이라는 결론으로 '부시의 당선'이 확정됐다.

그래서 '법원이 뽑은 대통령'이라는 미국 대선(大選) 역사상 초유의 이변이 낳은 산물이 현 '부시정권'이다.

그러나 그 내막을 파고 들어가보면 양 진영 지지자들의 격렬한 싸움이 보혁(保革) 갈등의 국론분열로 이어지면서 자칫 헌정위기 국면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다 미국의 치부가 드러나는 걸 우려한 미국민들이 사실상 '고어'에게 패배승복의 압력을 넣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엔 언론들이 법정공방 초반부터 여론조사를 통해 '고어'를 벼랑으로 내몰았고 정계 원로들의 승복권고가 깔려있다.

우리의 지난 대선때나 작금 '탄핵정국'에 접어들면서 우리에게도 대통령마저 승복할 수 밖에 없는 '건전한 여론'과 누구도 그 뜻을 거스를 수 없는 '국가 원로'가 왜 없는지를 새삼 안타깝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탄핵사태로 빚어지고 있는 국론분열 현상은 코앞에 닥친 총선으로 연계되면서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띨것 같은 우려 탓에 더더욱 절실하다.

설사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결정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이 보혁(保革) 갈등의 국면이 진정될 것인가. 우리의 정치구조로 봐 아마 그건 힘들것 같고 오히려 더 심화되지 않을까 참으로 우려된다.

이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기 전에 누구든 양비론(兩非論)을 펴서라도 대타협을 끌어냈어야 했다.

문제는 언론도 제구실을 못할뿐 아니라 설사 '바른소리'를 했다해도 그게 한쪽의 구미(口味)에 맞지 않으면 배신자이고 다른쪽의 편에 들면 어용(御用)으로 몰리는 이런 2분법적인 풍토속에선 '건전한 여론'을 향도할 수 있는 언론을 기대하기가 힘든다.

더더욱 역대 대통령들이 있지만 욕먹기 싫다고 은신하거나 이미 '하자있는 전직(前職)'으로 국민들의 추앙을 받을 처지도 못돼 있는게 또한 현실이다.

게다가 '개혁'이란 이름으로 나이 많은 세대를 시대에 뒤떨어지는 수구로 치부해버리는 풍토가 점차 굳어지면 학계나 종교계 법조계 등등의 원로들은 '쓸모없는 노인네'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비근한 예로 대중가요 작곡가 정풍송씨가 그가 존경하는 김수환 추기경을 위한 노래를 직접 작곡해서 부른 음반을 낸 사연에 접하면서 착잡한 심경을 떨쳐버릴 수 없다.

얼마전에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방문을 받은 김 추기경이 반미(反美).친북(親北)경향.관권선거 가능성 등에 우려의 뜻을 피력하자 일부 인터넷언론등 사회 일각에서 격렬한 비난이 있었던 것에 유감을 가진 정씨가 김 추기경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자비로 음반을 냈다고 피력했다.

그는 천주교인도, 야당지지자도 아니지만 지금 우리사회에 존경받고 있는 원로가 몇 안되는 현실에서 김추기경마저 정치적 이해에 따라 무너뜨리는 험악한 사회분위기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음반을 냈다고 털어놓은 그의 얘기는 많은걸 일깨워주고 있는 담백한 토로이자 원로가 설자리가 없는 우리 현실을 대변하고 있지 않나 싶다.

또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만약 야당의 대표가 대통령이 됐다고 가정해 봤을때 그가 "무슨 당을 찍는 것은 어느당을 돕는일" "여당표만 얻을수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걸 하겠다"고 언급했다면 열린우리당은 가만히 있었겠으며 그걸 빌미로 열린우리당이 국회에서 탄핵안을 가결시켰다면 한나라.민주 양당은 조용히 헌법재판소의 결정만 마냥 기다렸겠느냐도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다 대통령의 발언이 잘못됐으면 그걸 잘못됐다고 직언하고 그렇다고 해서 탄핵까지 할 수 있느냐고 야당도 꾸짖으며 양쪽의 충돌을 사전에 막아낼 수 있는 완충역할의 원로그룹이 있었다면 나라가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게 아닌가 싶다.

그 토양을 마련하려면 '건전한 시민의식'이 차곡차곡 쌓여 진정한 민의(民意)로 작용돼야 한다.

지난 미국 대선(大選) 재검표 시말(始末)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겐 절실한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박창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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