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선행'좇다 학습의욕 잃을라

'남보다 먼저', '남보다 많이', '남몰래 가르치는 것'이 앞서가는 학부모가 명심해야 할 핵심 사항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언제부터인가 국적불명의 '선행학습' 붐이 일고 있다.

그러나 미리 진도를 나가는 것을 교육학적 용어로 선행학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조기진도라고 해야 한다.

초.중.고 학생들의 사교육비 중 상당 부분이 조기진도에 소요되는 경비이다.

문제는 조기진도의 효과다.

물론 소수의 학생들에게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학생들에게는 학습 의욕을 떨어뜨리고 자칫하면 공부를 포기하게 할 수 있다.

미리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을 하기가 쉽다.

처음 배울 때 철저히 이해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그 부분을 틀릴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쉬운 단원이라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 깊이 있게 이해하고 연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조기 진도보다는 예습의 습관을 가지면 새로운 내용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고 더 적극적으로 수업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기진도의 실태와 대책에 대해 과목별로 알아본다.

◇수학

모든 교과가 다 그렇지만 특히 수학은 한 단원의 기본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 응용 문제로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다져야 다음 단계로 쉽게 넘어 갈 수 있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에서 어느 한 부분만 소홀히 해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가 어렵다.

많을 수험생들이 현재 배우고 있는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충분한 연습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은 학습 의욕을 상실하게 되고 수학에 흥미를 잃게 된다.

대부분의 수학 교사들은 중3 때 공통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고교에 진학해서 수학을 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고1 때 수Ⅰ.Ⅱ에 몰두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고1 때 공통수학 과정을 충분히 다져놓지 않으면 그 다음에 무엇을 배우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수학은 처음 배울 때 개념 파악을 잘 해야 하는 과목이다.

첫 단계에서 어설프게 이해하거나 단순히 문제 풀이 위주의 패턴에 집중하다 보면, 수능시험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다소 생소한 유형의 문제에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은행에서 출제되는 모의고사에서는 고득점을 하는데 실제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는 수험생들 중 상당수가 조기진도로 그 전 단계의 기초를 충분히 이해하고 연습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영어

어떤 의미에서 보면 영어에서는 조기진도라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문법을 예로 들어보면 부정사, 동명사, 분사와 같은 준동사는 중학교에서도 배우고 고등학교에서도 배운다.

출제되는 문제의 어휘와 난이도에서 차이가 날 따름이다.

일부 학자들은 어린 나이에 외국어를 시작해야 2개 국어 동시 구사 능력이 배양된다고 주장한다.

중.고교 때 시작하면 논리로 외국어를 배우기 때문에 원어민 수준에 이르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기 교육이 지나칠 경우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특히 취학 전 어린이의 경우 영어와 우리말의 어순과 논리 전개 방식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모국어 구사 능력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은 오히려 생산성 면에서의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현재의 취학 전 아동의 영어 유치원과 중.고교생의 TOEIC, TOEFL, TEPS 열풍이 과연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성과를 거두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이를테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글을 이해할 수 있는 교양과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해석은 하는데 그 함축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수능 영어에서도 고득점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언어 영역에 적용되는 풀이 방법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 어휘 실력과 독해 능력이 없으면 고급영문의 해석과 이해도 어렵다.

일반적으로 저학년일수록 한 군데 이상 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보면 이것저것 배우는 것은 많은데 실제로 얻는 것은 별로 없기 쉽다.

영어과 교사들은 많이 벌려 놓기 보다는 하나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 본문만 다 암기해도 엄청난 학습이 된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어휘들을 영영사전을 통해 철저하게 정리하고 암기하면 학원에 한두 군데 다니는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언어, 사회.과학

언어는 국어 교과서를 미리 가르치는 것 보다는 일부 부유층 자녀들을 상대로 하는 논술, 철학, 독서지도 등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몇몇 학원에서는 엄청난 수강료를 받고 논술과 심층면접 등의 강의를 하고 있다.

어린이와 중.고교생을 상대로 철학 강의와 독서 지도를 하는 경우 나이와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어려운 내용과 딱딱한 논리를 다루는 경우가 흔히 보이는데, 정도가 지나치면 독서가 주는 재미를 잃기가 쉽다.

초.중학생의 경우 논리보다는 작품을 통한 감수성과 직관력, 상상력의 배양에 힘쓰는 것이 나중을 위해 훨씬 도움이 된다.

많은 작품을 읽고 바탕 지식을 쌓은 다음 논리적 훈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논술을 잘 하기 위해서는 글 쓰는 요령을 익히기에 앞서 많이 읽어야 한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쌓게 되면 글쓰기 요령은 쉽게 배울 수 있다.

심층면접이나 논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소 신문, 잡지 등을 통해 시사적인 쟁점들을 정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사회과목의 다양한 기본 개념들을 먼저 이해하고 그 내용을 현실적인 문제와 접목시켜 사고하는 훈련을 하면 심층면접에 충분히 대비가 된다.

과학 과목의 경우 일부 사설학원에서 중학교 때부터 영재학교나 특목고를 목표로 어려운 과정을 미리 가르치고 있다.

이런 과정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경우 흥미와 학습의욕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일부에서는 심층면접에 대비한다며 대학 과정의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기도 한다.

지금까지 여러 대학에서 출제된 과학과목의 기출문제를 검토해 보면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따라서 교과서의 기본 내용을 먼저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심화 학습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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