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환갑을 맞은 연극인 이필동(60), 김현규(60)씨는 대구 연극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통한다.
지난 1961년과 1963년 각각 연극판에 뛰어들었으니 40여년을 '연극'과 '배우'라는 네 글자만으로 살아온 셈이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나요. 1961년 차범석 선생의 '밀주'(密酒)에 이장 역을 맡아 당시 국립극장으로 쓰여졌던 대구 키네마극장(현재 한일극장) 무대에 처음 오른 게 엊그제 같은데…". 이씨는 경북고 재학시절 연극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데뷔 무대의 뒷이야기가 다소 복잡하다.
2.28의거 1주년 기념 공연으로 연극을 올릴 예정이었는데 배우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서게 됐다는 얘기였다.
"연극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요. 그땐 정치가가 꿈이었죠. 그런데 무대에 서보니 생각이 달라지더군요. 군중을 사로잡는 힘, 정치인에게 필요한 것을 연극에서 배울 수 있겠구나 싶더군요".
반면 김씨는 "연기가 좋아 무작정 연극판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가 40여년간 줄곧 연기라는 한 우물만 판 이유다.
"당시 함께 연극을 시작했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연출이나 기획 등 다른 분야로 옮길 때도 저는 무대를 떠날 수 없었지요. 연기가 너무 좋았던 데다 여전히 부족한 게 많아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0대 초반이었던 이들의 연극인생은 1963년 대구 연극 중흥의 씨앗이 되자는 기치를 걸고 함께 만든 극단 '신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엔 연극환경이 열악했어요. 극단 사무실은 고사하고 변변한 연습실조차 없었으니". (이필동) "학교 운동장에서 연습을 많이 했어요. 가로등이라는 훌륭한(?) 조명 시설이 갖춰진 곳이었죠. 허허". (김현규)
겨울엔 두꺼운 외투를 입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연습을 하고, 당시 지역의 유일한 공연장이었던 'KG홀'(현재 시민회관)을 대관하기 위해 중앙통의 모든 상점들을 돌며 표를 팔았다는 일화는 까마득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조명비를 안 냈다는 이유로 공연 중에 불이 꺼진 적도 있었어요. 그러면 공연 중에 집으로 쫓아가서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와 그걸 담보로 겨우 공연을 마치기도 했지요". 이씨의 말에 김씨도 거든다.
"지금 그랬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엔 불 꺼진 객석에서 관객들이 30분 동안 기다리곤 했어요. 얼마나 고맙던지".
열악하고 힘든 연극인생이었지만 그들이 40여년 간 줄곧 무대로 '출근'한 이유는 뭘까. 그들은 바로 관객들의 힘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김씨는 "TV가 보급되지 않아 놀 거리가 충분치 않았던 당시 우리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인해달라는 여학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오빠부대의 원조였다"고 믿기 힘든 말을 했다.
그러자 이씨는 더한다.
"60~70년대 문화코드였던 윤정희, 문희, 남정임, 신성일, 엄앵란 등도 우리 인기엔 미치지 못했을걸. 하하".
그들은 "연극이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는 요즘 후배들을 보면 그때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고 했다.
"'연극만 해서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요즘 후배들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겠죠. 그러나 연극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연극인이라는 자부심과 보람도 가졌으면 좋겠고요".
대구 연극계 1세대인 이들의 다음 목표가 궁금했다.
"후배들이 마음껏 연극할 수 있는 소극장을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해야할 일이 아닐까요".
정욱진기자 penchok@imaeil.com사진: '영원한 현역'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연극계의 '영원한 주역' 이필동,김혁규
씨(오른쪽).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연극인들에게는 든든한 힘이자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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