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가야. 고통스런 삶의 번뇌를 벗어나 해탈의 길을 찾아 고행하던 싯다르타가 새벽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곳. 그래선지 그다지 크지 않은 마을은 항상 부처(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을 얻으려는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장터처럼 북적댄다.
난민으로 보이는 티베트 인들과 붉은 가사를 걸친 라마승들도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불교를 숭앙하는 그들에게 부처는 모든 가치의 중심이자 극점일 것이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어놓고 천천히 마을 거리를 배회한다.
불교의 성지답게 오가는 각 나라의 순례자들과 수도승, 원주민들의 얼굴에서 평온하고 순수한 미소를 보는 건 경건해진 나의 마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수령을 알 수 없는 크고 오래된 보리수와,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를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세웠다는 피라미드형의 높다란 마하보디 사원을 둘러보며 나는 아득한 세월을 건너온 부처의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애써본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으려고 고행하던 전정각산(前正覺山)과 부처에게 젖죽을 공양한 수자타란 여인이 살았던 세나 마을을 둘러본 뒤 네란자라 강으로 돌아왔을 때 하얀 모래가 깔린 널따란 강바닥에는 결 고운 저녁 노을이 내려와 있다.
나는 옛날 부처가 건너다녔을 강을 맨발로 건너볼 심산으로 바지자락을 걷고 물이 얕은 백사장을 걷는다.
물은 깨끗하고 따뜻하다.
어디선가 경전을 외는 소리가 꿈결처럼 강을 건너온다.
바라나시의 옛날 지명은 베나레스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물이 인도의 북부평원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을 거쳐서 도착하는 곳. 삼천 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진, 힌두교의 성지 중의 성지로 불리며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 누구도 바라나시를 모르고선 인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바라나시 역에서 탄 오토릭샤는 인파로 북적이는 시장 입구에 나를 내려놓는다.
나는 시장 중간의 좁은 골목길을 찾아든다.
화장터가 있는 가트로 가는 길은 미로와도 같은 무수한 골목길로 이루어져 있다.
익숙한 사람도 쉬 길을 잃게 되는 복잡한 골목길 속에는 숱한 가게들이 갯가의 따개비처럼 늘어서 있다.
귀걸이와 팔찌, 사리 따위의 장신구와 짜이와 담배, 구리주전자나 향로, 화환과 목향 등의 장의용품을 파는 작은 점포들이다.
그 골목을 빠져나오면 끝에는 항상 시바의 초승달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윤회의 강이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인가. 내가 처음 접한 바라나시는 마치 지옥과 현실이 공존하는 그로테스크한 중세의 그림을 연상시켰다.
밤낮 없이 하늘을 뒤덮은 잿빛 연기와 수십 구의 시체가 타는 매캐하면서 역겨운 냄새, 그리고 화장터의 붉은 불빛과, 화염에 달궈진 몸에서 나는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 그리고 허공에는 아이들이 날리는 꼬리 없는 연들이 창공을 날고, 그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강가(Ganga. 갠지스)와 지극히 일상적인 사람들과 평화스런 도시 풍경은 너무 부조화해서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그건 삶과 죽음이 서로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 내가 죽음 속에 있고 죽음이 내 속에 있다는 걸 깨달았던 때문이기도 했다.
여기서 만나네요.
뜻밖의 한국말에 돌아보니 놀랍게도 첫날 인도 행 비행기에서 만났던 혜원이란 여자다.
배낭을 맨 그녀는 햇볕에 그을린 건강한 모습이다.
뭄바이에서 아마다바드와 델리를 거쳐 오늘 여기 도착했다고 했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여유를 보이는 그녀는 이제 인도여행에 얼마간 익숙해진 듯 보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숙소를 구하러 다니기로 한다.
이왕이면 같은 호텔에 묵는 것이 어떠냐는 나의 반 농담조의 제안에 그녀는 뜻밖으로 흔쾌히 응한다.
몇 군데를 둘러본 끝에 그녀와 나는 가격도 적당하고 강가가 잘 내려다보이는 옥상 레스토랑이 있는 5층의 게스트하우스에 방을 얻는다.
여장을 푼 다음 나는 그녀를 남겨둔 채 숙소를 나온다.
곧장 골목길을 더듬어 제일 화장이 많이 이루어지는 마니까르니까 가트(Ghat)로 향한다.
언제나처럼 좁다란 골목길에는 흰 소가 어슬렁거린다.
좁은 골목 중간쯤에서 들것에 실린 시체를 매고 오는 장례행렬을 만난다.
노란색 린네르와 재스민 화환으로 뒤덮인 시체는 삐죽하니 검은 발이 드러나 있다.
뒤를 따르는 남자들이 낭랑하게 만트라를 읊는다.
벽에 붙어서 장례행렬에 길을 내주고 있을 때 인근 가게의 한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왠지 얼굴이 낯이 익다.
지난 번 방문 때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 남자다.
나는 그에게 짜이를 청한다.
남자는 진흙토기에 짜이를 담아 준다.
짜이를 마신 뒤 난 토기를 바닥에 던져 깨트린다.
골목 가장자리에는 손님들이 던져서 깨어진 토기 조각들이 꽤나 많다.
처음에 나는 왜 한번밖에 쓰지 않은 토기를 바닥에 던져 깨어버리는지 좀은 아깝게 여겼다.
하지만 곧 그 행위에 인도인들의 독특한 생사관(生死觀)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즉 토기의 본래 목적이 차를 담는 그릇인 것처럼 사람의 육체 또한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영혼이 떠난 육체는 그저 하나의 물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게 그들의 인식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네처럼 죽은 사람을 비싼 관으로 장식하거나 돈을 들여서 호화 분묘를 만들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화장을 해서 그 가루를 어머니 강 강가에 흘려보내는 게 가장 훌륭한 장례식인 것이다.
강가의 가트에는 언제나처럼 시체를 태우는 연기로 자욱하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서서 시체를 화장하고 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시체가 불길에 타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다.
개와 소들도 예사롭게 화장터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실제 밤이 되면 개들은 타고남은 것들을 뜯어먹기도 한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는 살아 숨쉰다는 것뿐이군요.
언제인지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내 뒤에 와 서 있다.
멀미라도 할 것처럼 얼굴이 몹시 핼쑥하다.
그럴 것이다.
처음엔 누구나 강가에서 벌어지는, 마치 가든 파티라도 하는 듯한 이 화장장의 광경을 보면 자신의 육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지, 살아 있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인지 되묻게 될 것이다.사진: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마니까르니까 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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