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께서 진각국사라 시호를 내린 후 탑을 대각원조라 이름하시고 신(이색)에게 비명을 쓰라 하명하시니…(중략)…대사께서는 두루두루 냇물처럼 흘러다녔고 밝고 빛나기는 저 해와 같도다.
임금께서 대사를 숭배하여 국사로 삼으셨다".
고려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 당시 고승(高僧)이었던 배천희(裵千熙)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숨진 후 왕명에 의해 지은 비문의 일부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년)에 씌어진 이 비문은 현재 경기도 수원시 수원성곽 안에 있으며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가 설산(雪山)인 배천희(1307~1382.고려 충렬왕 33년~우왕 8년) 국사는 포항시 북구 흥해읍에서 태어난 고려말의 유명한 대덕고승이었다.
13세에 화엄종(華嚴宗)인 반룡사(盤龍寺)의 일비(一非) 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19세에 승과에 합격한 후 금생사, 덕천사, 부인사, 개태사, 낙산사 등 10여 사찰의 주지를 지내다 76세(법랍 63세)로 입적했다.
이같이 국사는 고려말 승려로서는 최고자리인 국사가 되어 임금과 백성이 우러러볼 정도의 고승이었다.
하지만 배천희 국사가 태어난 곳이 흥해라는 것과 흥해에 국사의 무덤, 유허비, 사당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국사의 유허비와 비각, 사당, 무덤의 당간지주 등 귀중한 문화재가 아무런 보호대책 없이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난 위험은 물론이고 훼손마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먼저 찾아간 곳은 흥해읍 학천리 포항공원 묘원에서 좁은 비포장길을 따라 서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유허비. 높이가 1m 정도되는 비석의 비문은 '國師裵先生遺虛碑(국사배선생유허비)'라 음각되어 있다.
하지만 양 옆에 새겨진 작은 글씨는 세운 연도와 새긴 이의 이름을 나타내는 듯했으나 마모돼 또렷하지 않다.
비석과 글씨의 마모상태로 보아 국사가 입적한 직후 이곳 고향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유허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은 낡아 허물어질 정도고 문에는 자물쇠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
저 귀중한 유물을 누가 훔쳐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당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4km정도 떨어진 천곡사 바로 옆에 있다.
절에서 북동쪽으로 200여m 떨어진 산의 초입이다.
사당 역시 본체와 담장 모두 낡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보인다.
이틀 전 태풍 '디앤무'때 내린 비가 천장에서 흘러내려 아직도 바닥이 흥건하다.
국사의 후손인 배재원(48)씨는 "원래 사당은 유허비와 함께 있었지만 해방 직후 이곳 천곡사 옆에 사당을 새로 지어 이곳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며 "아마 유허비가 있는 산이 너무 멀고 험해 새벽녘에 향사를 지내기 어려워 이곳에 사당을 새로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도 후손들은 1년에 두차례(음력 3월보름, 9월보름) 사당에서 향사를 지낸다.
사당의 기둥과 대들보, 그리고 담장에서 무너져 내린 두껍고 오래된 빗살무늬 기와만으로도 문화재적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사당을 중수할 때 이들 문화재를 그대로 사용할 것인지, 영일민속박물관으로 옮겨야 할 것인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덤은 사당에서 북쪽으로 승용차로 20여분 정도 거리인 흥해읍 양백리 마을 뒷산(일명 백산)에 있다.
일반인들의 무덤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대형 당간지주 2개가 무덤 양쪽에 우뚝 서 있다.
높이가 1m40cm, 4각형(한면의 너비 30cm 정도)으로 한개에 홈이 4개씩 있다.
향토사가인 황인(포항정보여고 국사교사)씨는 "당시 큰 스님들의 경우 묘를 쓰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며 "큰 스님의 묘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당간지주를 세운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일반적으로 무덤에는 망주석을 세우지만 당간지주를 세운 무덤은 아직 국내에서 본 적이 없다는 것.
후손(국사의 유일한 형인 '배전'의 후손들로 흥해 배씨)들은 해마다 음력 10월7일 이곳에서 묘사를 지내고 있다.
황 교사는 "포항시는 하루빨리 유허비와 당간지주, 무덤 등에 대한 문화재 가치를 고증해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는 한편 보호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임성남기자 snlim@imaeil.com사진: 배천희 국사를 모신 사당이 비가 새는 등 허물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사진은 후손인 배재원, 배재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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