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신문/가상인터뷰-왜군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도공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병들은 약 10만명의 조선인을 납치했다.

잡혀간 조선인들은 노예로 팔리거나 병들어 죽고, 일부는 학살됐다.

1597년 조·일간 국교 재개 교섭이 시작된 이래 1606년까지 일본측의 성의 표시로 귀환한 조선인은 5천720명. 일본군에 납치됐다가 귀환한 도공 김사진을 만났다.

△납치된 조선 민간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끌려간 조선인 대부분은 큐슈·시코쿠와 혼슈에 살고 있다.

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한다.

조선인들 대부분은 권세 가문에서 잡일을 하는 노비 신세다.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공장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당신은 도예 기술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어떤 일을 했나.

-왜병들은 도자기 약탈과 도공 납치에 혈안이었다.

왜란 전까지 일본의 도자기와 식기 제작기술은 형편없었다.

그들 눈에 조선 도자기는 엄청난 보석이었다.

도자기는 비싼 값에 팔렸다.

조선 침략에 나섰던 장수들은 저마다 도자기를 챙기고, 수백 명의 도공을 잡아가 자기 영지에 도요(陶窯)를 설치하고 도자기를 굽게 했다.

특히 출병한 일본의 다이묘(영주)들 중에는 도자기를 자신들의 특산품으로 지정해 재정 적자를 메우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고급 도자기를 생산하는 다이묘가 떼돈을 버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주로 어떤 지방에 유명한 도요가 설치됐나.

-야마구치현의 하기야키, 가고시마현의 사쓰마야키, 지쿠젠의 다카토리야키와 부젠의 아가노야키에 조선 도공들이 많았다.

이삼평이라는 충청도 도공은 아리타의 덴구골에서 도자기 제작에 알맞은 흙을 발견하고 일본 최초로 백자기를 구워내기도 했다.

△조선 도공들은 일본에서 대우가 좋다고 들었다.

-큰돈을 벌어주니 대우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학식 있는 유학자들도 일본 학자들을 가르치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고향과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서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으면 무슨 소용인가.

△일본에서 또 다른 나라로 팔려간 조선인이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렇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조선인을 사들여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팔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부산까지 배를 파견해 일본군에 잡힌 조선인을 사들여 팔았다.

일본의 대외무역 중심지인 나가사키, 헤이코에서도 조선인들이 많이 팔려갔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 중에는 예수교에 심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조선인들이 키리스탄(일본에 처음 들어온 가톨릭교의 일파) 신자가 되고 있다.

나가사키에는 조선인 신도가 2천명이나 된다.

한글로 된 교리서가 나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일본 막부의 키리스탄에 대한 박해가 심하다.

언제 대대적인 체포령과 참수형이 내려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할 작정인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막막하다.

빈손으로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조선사회는 일본과 달리 도공을 푸대접한다.

잡혀간 도공들 중에 차라리 일본에 남겠다는 사람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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