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거창 양민 합동장례식

"빨갱이 오명 못다 풀고 떠나니, 원통하고 원통할세…"

53년간 구천을 떠돌았으나 맺힌 한을 풀지도 못한 채 장례를 치러야하는 것이 억울한 듯 상여 종구쟁이(앞소리꾼)의 목소리가 울분을 토하듯 애닯다.

가랑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6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 박산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된 양민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초혼(招魂.영혼을 부르는 것) 장례식'이 유족.후손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합동으로 치러졌다.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도 국가의 배상은 커녕 빨갱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쓴 채 영혼을 안장시켜야 하는 유족들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어진 듯 아무도 말이 없었다.

당시 열일곱의 나이로 마을 뒷산으로 도망쳐 화를 면했으나 부모.형제.형수.조카 등 7명을 잃었다는 김만수(71.신원면 과정리)씨. 오른쪽 팔이 없는 장애자의 몸으로 장례식에 나와 그때를 회상하며 울분을 토했다.

"온 가족을 몰살시켜 놓고 추모공원이 무슨 말이냐"며 "그때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못산다"고 울먹였다.

아직도 위령비를 바로 세우지않고 비스듬히 눕힌 채 희생자 517명(남109, 여183, 소아225)을 셋으로 나눠 안장한 박산골 합동묘역에서는 한 할머니가 큰절을 올리고 실신한 듯 주저앉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과 오빠.언니.동생.숙모까지 8명을 잃고, 7년전 세상을 떠난 남동생 신윤철(72)씨와 한 많은 생을 살아왔다는 기순(76.산청군 차황면)씨다.

신 할머니는 "친정의 단 한점 혈육인 동생마저 세상을 떠나 내가 상주가 됐다"며 "구천을 떠돌지 말고 천국의 좋은 자리에 갈 수 있도록 빌었다"며 말문을 닫았다.

거창 신원면 양민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 지리산 공비토벌을 위해 주둔한 당시 11사단 9연대 3대대 국군에 의해 무고한 양민 719명(박산골 517, 청연골 84, 탄량골 100, 연행도중 18)이 처참히 학살된 사건이다.

희생자는 대부분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들이었다.

최고의 희생자를 낸 박산골에서는 당시 생존자가 3명 있었으나 문홍준(당시 32).정방울(당시 46.여)씨는 악몽과 후유증 등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당시 23세로 현재까지 유일한 생존자인 신현덕(76)씨는 참석치 않았다

"거창쪽은 쳐다도 보기싫다"며 고향과 친인척간의 인연까지 끊고 현재 울산에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시 군사재판에서는 이 사건을 순수한 양민 학살로 인정, 지휘관 등에게 최고 사형까지 구형했다.

그러나 5.16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배상을 요구하는 유족회 임원 17명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투옥시키는 등 압박까지 받아왔다.

최근 특별법 개정으로 200여억원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등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가 나서고 있으나 배상관계는 부산고법에서 공소시효 말소로 패소, 대법원에 항고하는 등 맺힌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날 장례식은 박산골 합동묘역에 안치된 517명 희생자에 한한 것이며 청연과 탄량골 유해는 협의가 이뤄지지 않아 오는 10월초 계획된 추모공원 준공식과 합동추모제가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추모공원 관리사무소측은 '거창사건희생자'로, 유족회는 '거창양민학살희생자'로 표기해 간판을 내걸고 있어, 맺힌 한을 풀지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창.정광효기자 khjeo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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