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속 오늘-'시일야방성대곡'게재

"(전략)저들 개, 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 대신은 족히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는 자들인 것이다.(중략)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된지 사흘 후인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논설(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해 목놓아 울었다. 이를 통해 장지연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비난하고, 을사오적은 나라를 팔아 우리 백성을 노예로 만드려는 매국노로 규정했다. 또 고종 황제가 을사조약을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임을 온 국민들에게 알렸다.

이날 황성신문은 평소보다 1만 부가 더 인쇄돼 서울 전역에 배포됐다. 신문이 배포된후 장지연은 체포돼 경무청에 수감됐고, 사원 10명도 체포됐다. 그리고 황성신문은 검열을 받지 않고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무기 정간을 당했다. 다음날 대한매일신보는 장지연을 강한 논조로 찬양했지만, 친일계 신문들은 과격한 논조는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라며 국민들도 자중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을 실었다.

장지연은 대명률잡범편에 의해 태형을 선고 받았으나 1906년 1월 24일 석방됐고 2월 2일엔 신문도 속간됐다.

민족의 심금을 두드린 명문의 탄생이었지만, 시대의 대세를 되돌리기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1873년 프랑스군, 하노이 점령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전범재판소 개정 ▲1948년 국회, 국가보안법 제정 ▲1975년 서문시장에 큰 화재, 1천900여 점포 소실.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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