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入논술특강②-문제

문제

문》 다음 제시문은 정체성에 관한 글들이다. 글(가)에서 지적한 정체성의 두 측면을 기준으로 글(나)와 글(다)에 나타난 청소년 정체성 문제를 분석하고, 요즘 청소년 문제와 결부시켜 진정한 청소년의 정체성은 어떠해야 하는지 논술하시오.

(띄어쓰기 포함 1,600자 ±100자)

(가) 정체성(identity)은 사회학적 정의가 보여 주듯이, 내가 누구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집합이다. 그것은 나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지위와, 그 지위에 결부된 역할에 관한 일련의 정의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러한 일련의 정의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이 주체화된 결과를 보여 준다.

그것은 이중의 의미에서 동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는 지위로 요약되는 사회적 관계가 '나'라는 주체가 서 있는 자리와 동일하며, 역할로 요약되는 규범의 집합이 내가 선택하는, 혹은 당위로 간주하는 행동의 집합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동일성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행동이고, 따라서 나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것이 대개는 사회적 규범에 따르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미 나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는(동일한)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위상이 이전의 '나'와 동일하며,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나'일 것이라는 의미에서 동일성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를 나로서 고정한다. "길동아"라고 불리는 15세의 '나'와 "홍길동 씨"라고 불리는 40세의 '나' 사이에, 중학교 다니는 '나'와 대학에서 가르치는 '나' 사이에, 혹은 일찍이 전복과 저항을 꿈꾸던 '나'와 이제는 돌아와 가족을 걱정하며 주어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나' 사이에 존재하는 '동일성'이란 얼마나 취약한 것일지! 그러나 정체성은 이러한 상이한 모습과 상이한 태도들 사이에 동일성의 등가선을 설치하고 고정한다. 신원의 동일성을 보장하는 증명서(예를 들면 주민등록증)는 이러한 동일성을 법적으로 고정한다. 그것은 적어도 새로운 변이와 변화를 항상 이미 방지하고, 발생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최소한의 폭으로 제한하는 효과를 갖는다. 주체화가 포함하는 가변성은 이러한 정체성을 통해 고정화되고 안정화된다.

이처럼 정체성은 자신에 대한 복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에 대한 복종이며, 과거와의 동일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삶의 반복이다. 그러나 정체성이 이러한 동일성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주체화로의 정체성은 언제나 주어진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만은 아니며, 그런 만큼 단지 예속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주체화는 벗어나고 이탈하는 주체화의 점에서 시작한다.

- 이진경, '근대적 주체와 정체성'에서

(나) 자의식이 발달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진다. 어린애들도 철이 들어 자아가 싹틀 무렵에는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한다. 어른들이 하는 일은 다 해 보고 싶어한다. 하물며 이제 막 성인 대접을 받게 된 젊은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끔 내버려 두지 않는다. 오히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도록 강요한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인에 대한 간섭이 불가피하지 않겠느냐고 이해도 해 보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사람들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현실이 갑갑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차를 타고 떠나거나, 가까운 뒷산에 올라 "야호!"라도 외쳐야 살 것 같은 때가 있다. 이럴 때의 자유는 도피, 혹은 탈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일시적인 탈출로 기분 전환이 되어 그 다음의 일상 생활을 더욱 잘 영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일상 생활 자체를, 그리고 그와 함께 사회적 통념을 내팽개치는 사람도 있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가는 노라처럼.

순수한 열정으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젊은이들, 특히 예술적 성향이 강한 젊은이들은 현실에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다. 이들에게 현실은 너무 부조리하고, 더럽고, 얼토당토 않은 것으로 비친다. 나의 의식과 사회 현실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나는 사회 현실에 대해 반항하거나 사회 현실을 파괴하고자 시도하는 데서만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이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자유를 부정적 자유라 칭하기로 하자.

기성 세대의 눈으로 보면 부정적 자유는 일탈이며, 심지어 범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사악한 현실을 응징하고 부당한 현실에 복수하기 위해 부정적 자유를 갈망한다. 사회 구조를 내 마음대로 뜯어고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최소한 일반인들의 상식을 비웃어 주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러나 한 개인이 이 바위 같은 사회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집을 나간 노라는 어떻게 되었는가? 개인 차원에서 추구하는 부정적 자유는 결국 파멸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삶과 철학'에서

(다)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는 어제오늘 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3천년 전에 파피루스에 씌어진 글에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고대인들도 청소년이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방황하겠다고 작심하고 '방황하는' 청소년은 모르긴 몰라도 거의 없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욕구를 통제하는 자제력이 어른들보다 약할 뿐이다. 어른들은 청소년들이 어떤 행위의 영향과 결과를 깊이 통찰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여 행동할 때 방황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행동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종종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청소년에게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책임있는 행동, 그것이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이 글을 읽는 수험생이 짊어져야 할 책임을 생각해 보자. 무엇보다도 수험생은 공부를 성실하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라. 이것이 어른들이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책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언제부터 청소년들은 입시를 위한 학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책임을 짊어지게 된 것일까. 대학이 없었던 옛날이라면 입시와 관련된 여러 책임들은 짊어지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청소년기는 자의식이 급격히 확대되는 시기이다. 자의식이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의식이 있는 존재에게만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하더라도 그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정말로 나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단지 '나'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은 있다. 가령 나는 어느 학교에 다니고있는 고등 학생이고, 어떤 부모의 자식이고 음악을 좋아한다든가 영화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취향이 있고, 무엇을 하고픈 욕구가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 책임 등이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을 다 모아 놓은 것이 정말로 '나'인지가 불확실하다. 왜냐 하면 이런 것들은 정말로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은 원래의 '나', 진짜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식의 바다에서 헤엄치기'에서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