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역경제 삼키는 '공룡 할인점'-(1)유통 황폐화 10년

"역외 대형 할인점 앞엔 속수무책입니다.

식민지라는 굴욕감을 떨칠 수 없어요."

지난 1996년 지역에 할인점이 등장한 이후 군소 재래시장과 구멍가게들에게 남은 건 '절망'과 '한숨'뿐. 소매 상인들은 '더 이상은 안된다'며 속속 집단 행동에 돌입하는 등 생존에 몸부림치고 있다.

백화점들도 '벼랑끝 위기'를 느끼고 있다.

상처뿐인 대구·경북 유통 현장을 찾았다.

◇대구 월배시장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월배시장. 인근 이마트와 걸어서 5분 거리인 이곳은 '초토화'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시장 안쪽 보리밥 식당 주인은 점심시간 1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손님도 가게를 찾지 않았다고 넋두리했다.

인근 5, 6개 식당 역시 손님 1, 2명이 고작. 한 상인은 "대형 할인점이 들어오면서 시장을 찾아오는 단골 고객들의 발길이 뚝 끊긴 때문"이라며 "시장 사람들조차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는데 장사가 될 리 없다"고 씁쓸해 했다.

"하루종일 마수도 못하는 가게가 수두룩합니다.

" 과일, 채소, 건어물 노점 상인들도 할인점의 위력은 핵폭탄급이라고 했다.

노점 한 할머니는 "10년전만 해도 하루 3, 4박스씩 콩나물을 팔았지만 이제는 한 주먹도 힘들다"고 할인점을 원망했다.

"2001년 이마트 월배점이 들어서면서 하루 벌이가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200개가 넘는 점포가 지금은 70개에 불과하다", "2층 상가 경우 두달에 한 번 주인이 바뀌더니 법원 경매로 넘어갔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상인들은 "이제 월배시장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우울한 결론을 내렸다.

◇포항

대형할인점이 토종 상권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가면서 포항 상인들은 지난달 29일부터 '대형 할인점 건축 반대 범시민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대책위원회엔 죽도, 남부, 상대, 칠성, 형산 등 이 일대 7개 시장과 대도, 중앙 상가 등 수천명의 소매 상인들이 합세했다.

"안그래도 할인점이 포화 상탠데 ㅅ사가 또 할인점을 추진하기 때문이죠. 무슨 수를 쓰더라도 건축을 막을 겁니다.

"

김인엽 위원장은 포항오거리 이남은 할인점 때문에 아사 상태라고 했다.

이 주변엔 지난 98년 이후 동아마트, 메가마트, 이마트, 월마트 등 4개의 대형 할인점이 들어선 데다 킴스마트, 이지클럽, D마켓, LG슈퍼, 탑마트 등 중대형 마트 예닐곱개까지 신축을 거듭했다는 것.

"죽도시장의 3분의 1과 인근 상가 중 절반이 할인점 '후폭풍'으로 사라졌습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형산, 칠성시장은 생존 기반마저 무너진 상태죠."

김 위원장은 "10만명 서명운동에 돌입했다"며 "포항시는 단순히 소비자가 편리해진다는 근시안적 경제 논리로 접근하기보다는 영세 상인들의 폐업 속출과 할인점 자본의 역외 유출을 고려해 대형 유통매장의 무분별한 입점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동

지난달 12일 신세계 이마트 안동점이 문을 열자 지역 상인들은 곧바로 '불매 운동'에 돌입했다.

신시장, 구시장 등 지역 상가번영회가 연합해 안동상공회의소, 안동시의회, 안동농협 등에게 이마트 대신 지역 상가를 이용해 달라고 호소도 하고 있다.

안동경제살리기협의회 김윤한 추진위원장은 "할인점이 개점하면서 구시장, 신시장, 풍산, 용산, 복문 등 인근 재래시장 및 중형 마트 매출이 한 달 만에 50~60% 줄었다"며 "최소한 싸워라도 봐야하지 않느냐"고 했다.

안동경제살리기협의회는 대형 할인점 하나가 들어서면 반경 20km 이내의 7개 재래시장이 죽는다고 밝혔다.

5km이내의 구시장, 신시장이 빈사 상태에 이르는 것은 물론 의성, 예천, 영양, 청송, 봉화 일대 재래시장까지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안동 일대 재래시장 및 상가 점포 수는 3천여개로 1만8천명의 생계가 달려 있지만 안동시는 올 6월에야 이마트 준공 사실을 알려 공청회 한번 열지 못했다"고 불만도 터뜨렸다.

◇영주

인구 12만의 영주에는 상인들이 연일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홈플러스가 2천여평의 휴천동 부지에 연면적 8천평 규모의 대형 할인점을 짓기로 하면서 영주시 상인연합회가 할인점 건축 반대 시위에 나서는 등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것. 하루 벌어 살아가는 상인들이지만 역외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는 것을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절박함 때문.

상인연합회는 지난 9월부터 영주 시민들을 대상으로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10월부터 지금까지 홈플러스 건립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 시위에는 중앙, 공설, 번개, 종합시장 번영회는 물론 영주 제과, 생선, 떡집 협의회와 축산, 유통, 의류소매 협동조합 등 총 650명의 상인이 합류했다.

홈플러스 입점 반대추진위원회 김민규 위원장은 "홈플러스 건립 예정지는 영주 최대시장인 번개시장과 250m 거리에 불과합니다.

최소한의 상도의도 없습니다.

수백명의 재래시장 상인들을 죽여가며 바로 코앞에 대형 할인점을 짓는 대기업과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영주 공설시장, 소백쇼핑몰, 중앙시장, 공설시장 등 영주 4개 재래시장 규모를 모두 더해도 홈플러스 면적보다 작은데 무슨 수로 경쟁할 수 있겠냐는 것. 더욱이 재래시장 특별법으로 리모델링 사업까지 실시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할인점 출점이라는 이율배반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홈플러스 하나가 들어서면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내·외 유통업체들이 무차별 입점해 서비스업 중심의 영주는 도시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했다.

◇백화점

지난달 28일 오후 대구백화점 기획실. 영업본부장, 기획실장 등 직원 5명이 머리를 맞대고 영업전략회의를 하고 있었다.

주 안건은 할인점 매출 확대에 따른 대응전략이었다.

3년 전 추월당한 매출을 어떻게 만회할지, 이에 따른 매장 개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이 논의됐다.

회의 시간은 2시간을 훌쩍 넘겼고, 뚜렷한 결론 없이 며칠 뒤 회의를 다시 열기로 했다.

한 직원은 "지난 수 년간 수 많은 영업전략을 짰지만 역외 대형 할인점 파고를 넘기엔 역부족이었다"며 "해가 갈수록 격차는 더 벌어질 것 같은데 참 난감하다"고 했다.

지역 백화점들은 2001년부터 할인점에 역전당했다.

2001년 지역 백화점 매출액은 9천799억원인데 반해 할인점들은 1조원을 훌쩍 넘겨버렸다.

이후 격차는 더욱 벌어져 지난해 경우 할인점이 1조 3천830억원으로 역외인 롯데백화점을 제외하면 60%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 특히 올해는 할인점 매출이 1조 5천억원이 될 것으로 전망돼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는 것.

동아백화점 최경진 팀장은 "식품과 공산품 위주의 상품 구성을 해온 할인점들이 백화점 식품부문을 상당부분 뺏어간데 이어 이젠 백화점 영역인 패션잡화까지 대량 취급, 백화점의 목을 조여오고 있다"고 말했다.

할인점들은 중저가 의류나 잡화를 메인 매장인 1층에 대거 포진시켰고,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백화점들은 패션 안방의 한쪽을 할인점에 내주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고급화 전략으로 돌아서 수백억원을 들여 고가·명품 위주의 매장 개편을 단행했고, 사은행사, 세일 등 하루가 멀다하고 고객 서비스를 했지만 경기 침체에다 소비자들의 '할인점 병'까지 맞물려 악전고투하는 형편이다.

백화점들은 '더 이상 갈데가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대구백화점 김태식 상무는 "외환위기 이후 전국의 지역 백화점 줄도산 속에 대구만 옛 명성을 이었다.

하지만 이젠 역외 대형 유통업체 공세를 버텨내기는 무리"라며 "백화점 등 지역 소매상권 스스로의 자생 노력과 함께 '지역'의 도움이 절실할 때"라고 말했다.

기획탐사팀=이종규기자 jongku@imaeil.com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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