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5년 전 미국에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빌린 차를 운전해서 뉴욕 도심을 가다가 엉겁결에 좌회전 금지 표시가 있는 교차로에서 좌회전을 했다. 그런데 돌자마자 경찰이 서 있다가 정지신호를 보내왔다. 지리를 잘 모르고 영어도 잘 모르는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일단 차를 멈추고 차창을 열었다. 그리고 웃었다. 현지에 사는 친구들에게 배운 대로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듯 웃었다.
경찰은 처음에는 심드렁하게, 좌회전 금지 구역에서 좌회전을 했으니 법규위반이다, 운전면허증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해득한 유일한 말은 말끝마다 붙는 'sir'였다. 나는 그래도 예의는 바른 젊은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국제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플라스틱카드가 아닌, 펼치면 양 손바닥만한 크기의 흰 종이로 된 국제운전면허증을 받아든 경찰은 잠시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걸 들쳐보다가 한참 동안 뭐라고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sir?' 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 고개를 저었다. 내 짐작에 그는 다른 면허증이나 자동차등록증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자동차등록증이 차 안에 있긴 했지만 그걸 줬다가는 차 주인에게 벌금이 매겨질 게 뻔했으므로 절대로 줄 수 없었다. 그 차 주인의 집에서 공짜로 숙식을 제공받고 있는 바에는, 또 그 차 주인이 내 누이의 남편인 바에는.
경찰은 잠시 한숨을 내쉬는 듯하다가 다른 차가 좌회전을 하는 것을 보고는 독수리처럼 날아가 총알처럼 딱지를 발부했다. 그리고 또 한 대가 적발됐다. 한참 있다 포식을 한 표범 같은 표정으로 내게 돌아온 경찰은 면허증을 돌려주면서 '외국인이라도 미국에서 운전을 하면 미국의 교통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번 한 번은 봐드리겠지만 다음부터는 주의해서 운전하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하루가 되시기를.'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내가 어떻게 그 내용을 알았는가 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 정도는 눈치로도 알 수 있으니까. 그의 말이 끝까지 아주 예의 바른 존댓말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차분한 억양이었다. 잊을 만하면 'sir'를 붙여가며.
집에 돌아온 나는 자형과 맥주를 마시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원래 선진국이라서 경찰이 교통규칙을 위반한 외국인에게도 깍듯이 존칭을 쓰는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미국이고 한국이고 간에 사람들이 싫어하는 공무를 집행할 때는 트집을 잡히기 싫어서 으레 그렇게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나는 두세 마디 오가면 나이를 따지고 훈계부터 하려는 공무원들을 자주 접해온 한국에서의 경험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순전히 짐작에 의거, 혹시 미국 사람들이 버릇없이 굴다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경험을 했거나 지금도 뜨거운 맛을 보고 있기 때문에 힘이 들지만 예의를 지키는 건 아니냐고 물었다. 자형은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한 말 가운데서 가장 현실성이 높은 것 같다고 했다.
그리하여 내 짐작은 계속되었다. 미국 같은 다민족사회, 이질적인 요소가 뒤엉켜있는 사회에서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 따라서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한다. 처음 만난 사이에 억지 부리고 나이 따지고 핏대를 세우고 반말지거리를 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쉽게 말해 미국에서는 누구든 총을 쏠 수 있고 총에 맞을 수도 있으니 자극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규칙을 지켜야 한다.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할 때도 다른 운전자가 화나게 할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길을 걷다 누군가와 부딪치면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음식 가지고 장난을 쳤다가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그렇게 안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총기사고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대체로 예의가 바르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카파라치'에게 갓길을 주행하는 장면을 찍혀서 상상도 하지 못한 벌과금을 물었다. 화는 났지만 어떻든 조심하게는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카메라가 미국의 총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과속단속 카메라에 곳곳의 CCTV, 수천만 대의 디카, 핸드폰 카메라가 홍수를 이루고 있고 인터넷까지 있는데.
성석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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