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한스 요아힘 그립 지음/ 노선정 옮김/ 이른아침 펴냄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읽을거리'들을 마주한다. 매일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 책장이나 책상 위에 얹힌 책들, 심지어 거리의 간판 하나하나도 모두 읽을거리다. 그런 읽기를 통해 우리는 정보의 창고를 채워간다. 때로는 지식을 쌓고 세상의 소식을 접한다.
가령 공공시설의 벽에 붙어있는 '금연'이라는 글자를 보고, 그것을 읽음으로써 '여기서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약속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문자와 책에만 한정된 것인가.
읽기의 기원을 쫓다보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기의 한 부분 중에서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읽기'의 영역은 넓고 문자가 태동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돼 왔다.
읽기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것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건축가들은 집을 지을 때 땅의 상태를 읽는다. 영리한 사냥꾼은 숲 속에 난 동물 발자국을 보고 그 종류와 크기는 물론 언제 발자국을 냈는지 단번에 읽는다. 어머니는 아기의 얼굴 표정 속에서 기쁨이나 두려움, 놀라움을 읽는다. 포커판의 소위 '꾼'들도 결정적인 카드 한 장을 던지기 전에 상대편의 몸짓이나 표정을 먼저 읽으려 안간힘을 쓴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읽기를 시작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기원이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신석기인들은 체계화된 문자는 없었지만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신체를 읽으면서 질병과 상처, 골절 등의 치료법을 터득해 갔다. 그것이 주술적이고 초보적 차원이었을지라도 증상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몸을 읽기 시작했고, 개두수술(開頭手術), 간단한 골절 처치법 등을 찾아내며 의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집트인, 고대 그리스인, 바빌로니아인, 마야인,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종족과 가축을 지키고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 해와 달·별을 읽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생활과 연결시켰다. 그들은 시간을 나누고 달력을 만들면서 삶의 터전을 구축해 나갔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누적된 지식들은 기억에만 의존해서는 타인과 다음 세대에게 전해 줄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고, 또한 그 정확성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기록이 필요하게 됐고 문자가 발명돼 그것들이 돌에 새겨졌다.
읽기는 문자의 태동으로 새로운 표현과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됐다.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정리돼 형태를 갖추게 되고 그렇게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탄생시킨다. 읽기는 그리스·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학문을 낳았고, 학문은 교육의 체계를 발전시켜나갔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활발했던 서적 편찬과 거래는 중세에 막을 내린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목적만을 위해 서적을 필사했다. 고대의 세속적 교육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읽기는 이제 라틴어 교육으로 좁혀진다.
하지만 여러 민족 언어로 쓰여진 문학작품에 읽기 욕구가 강해지면서 결국 책에 대한 수요는 점차 늘어났고 교육이 다른 도시의 대학들과 경쟁하게 되면서 책의 상거래는 활기를 띠게 된다. 이는 곧 구텐베르크 활자 인쇄술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읽기는 새로운 장을 펼치게 된다.
저자는 여기서 발길을 멈춘다.
"예술과 문자, 다양하게 나뉜 여러 학문의 지식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라는 것이 하나의 나무라면 읽기는 그것이 있기 위한 토양이다. 즉 다양한 분량의 책과 언어, 문자 등의 지적 결과물이 나오기까지는 읽기라는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식의 대량 유통이 가능해지기 이전, 즉 인쇄술 발전 이전의 읽기와 지식의 감추어진 역사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읽기의 정당한 자리를 찾아주고 문자의 옳은 가치를 인정해 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읽기는 곧 새로운 지식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축적해 갈 수 있었던 인류 문명의 근원적인 힘이 됐다. 읽는 행위가 없이는 인간 정신의 발달도 없었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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