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하계U대회 3년을 맞아

토우처럼 엎드린 산자락으로 안개비가 내린다. 형형색색의 레이저와 현란한 조명불빛 아래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자기나라의 국기가 새겨진 원형무대에서 흥겹게 춤을 춘다. 춤사위가 무르익자 선수들이 다른 나라의 국기무대로 올라가 함께 춤을 춘다.

비단길에서의 문명의 만남이 동방의 작은 나라, 대구로 이어져 우리의 화려한 부채춤과 살풀이춤이 현대무용의 현란함과 어우러지고, 참가 국가들의 고유한 춤과 함께 밤이 깊어간다. 성화는 꺼지고 대덕산 상공으로 연화가 작렬한다. 관중들은 잊지 못할 이 밤을 위하여 괴성을 지른다.

축제는 끝났다. 열 하루(2003. 8. 21~8. 31) 동안 저 아프리카에서 달려온 선수도, 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용기 있게 참여한 이라크에서 온 선수도 돌아갔다. 이념적 이질감은 있지만 뜨거운 동포애로 환영했던 북한선수도 돌아갔다. 지하철 참사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 도시를 용광로처럼 달구었던 축제는 끝났고 길손들은 모두 돌아갔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국제대회인 유니버시아드대회의 개회식 공연의 주제는 '길'이었고, 폐회식 공연의 주제는 '정'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데는 만남이 필요하고 만남의 수단은 길이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길이 증오와 갈등의 길이었다면, 유니버시아드대회를 통하여 21세기 젊은이들이 살아가야 할 길은 사랑과 화해의 길이다. 이 길은 섬유패션도시, 환경도시, 동북아의 중추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의 길이기도 하다.

대구의 길 위에서 만난 지구촌의 젊은 지성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우정, 그리고 친절과 정이 각별했던 대구시민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서로 나눔의 정을 통하여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문화의 깊이를 알게 된 것도 유니버시아드대회의 수확이었다.

축제는 끝났고 길손이 떠난 이 경기장의 길 위에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2003년 봄부터 여름까지는 너무나 더웠다. 기나긴 5개월 동안의 연습과정에서 우리는 실로 무서울 정도의 대구라는 도시의 저력을 발견했다. 감독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진도 너무나 놀랐다. 폭염과 우천으로 출연자들 중 하루 10여 명이 병원으로 실려 나가는 과정 속에서 학부모들은 자기 자식의 건강보다는 자식의 불참으로 인해 연습에 차질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하며 스태프진에게 죄송함을 표하였고, 출연자들은 서로를 위로하면서 끝까지 연습에 임했다.

2002년에 어느 도시에서 개최한 아시안 게임 때 수험생 학모들의 엄청난 비난 전화 때문에 연습과정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냈다는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겁부터 낸 것이 기우였다. 20년 이상 살아오면서도 알지 못한 이 도시의 무서운 힘 앞에 당시 나는 고압선에 감전된 듯 큰 충격에 휩싸였다.

곱씹어 보면 아마도 이 힘은 역사의 고비마다 분연히 일어났던 대구의 정신이 아닌가 한다. 길손들은 짐을 꾸려 저마다의 일상으로 돌아간 지 3년이 지났고, 고인 듯 침잠한 이 도시에 먼 길 떠나는 물길이 열렸다.

유니버시아드대회를 계기로 대구의 잠재력을 활짝 펼쳐 황금빛 넘실대는 들판에는 일용할 양식이 질펀하고 넉넉한 인심과 예술의 향연이 그윽하길 바란다. 길손은 떠나고 길 위에 남은 우리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정으로 21세기 사랑과 화해의 만남을 주선할 귀중한 위치에 우뚝 서 있다.

최규목 (시인·2003유니버시아드대회 개폐회식 제작총괄담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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