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 전 시인 지망생이었던 이경림은, 무작정 그녀의 우상이었던 이성복 시인이 살고 있다는 대구행 열차를 탔다. 그러나 막상 대구에 도착한 그녀는 꿈에 그리던 대시인을 만난다는 것이 두려웠다. 전화할 엄두도 나지 않고 찾아갈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대구라는 낯선 도시를 방황하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은해사로 갔다. 은해사 빈 뜰에서, 팔공산 자락에서, 새로운 형식과 감수성의 시인 이성복과 문학에 대한 그녀의 주체할 수 없는 열병을 온몸으로 앓았다. 그리고는 다시 아쉬움을 뒤로하고 상행선 열차를 탔다. 그야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다만, 이성복의 시가 좋아서 저지른 그녀의 일탈이었다.
그의 주옥 같은 시들을 외며 시인의 첨예한 감성이 스쳐간 뜨겁고 서늘한 행간 속에서 몸서리치는 희열과 절망을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솟구쳐 오르는 범람하는 이미지들을 서툴게 문자로 옮겼을 것이다. 몇 년 후 그녀는 시인이 되었고 지금은 중견 시인의 반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지난여름 다시 은해사로 접어드는 팔공산 자락에서 시인 이경림은 뜨거웠던 청춘의 한때를 회상했다. 아직도 이성복 이름을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젖어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딘가 전력으로 몰두할 수 있다는 것, 가슴 속에 커다란 영웅이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삶이 설렌다는 것.
이성복 시인이야 현대 시문학사의 거대 산맥이다. 나 역시 이성복 문학에 대한 경외감을 어디서든 숨기지 않는다. 굳이 시인의 대가다운 철저한 자기관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가 이룬 문학적 업적과 빛나는 감수성의 언어들은 지금도 수많은 문학도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어떤 분야에서건 영웅은 있었다. 대중들은 그들을 보며 열광했고 문화라는 큰 물줄기는 대중들과 함께 소용돌이치거나 고요히 흘러갔다. 조용필과 서태지가 있어서 수많은 가요 팬들을 열광케 했고 임권택 안성기라는 걸출한 영화인이 있어서 수많은 영화 팬들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으지 않았는가.
영웅은 대중들에게 꿈을 심어준다. 사회가 안팎으로 어수선하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다시 꿈 꿀 수 있게 해줄 진정한 영웅의 탄생을 기다린다. 제2, 제3의 이경림이 어디선가 수줍게 꿈을 키워간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송종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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