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 책을 읽는다)허삼관 매혈기

허삼관 매혈기/위화 지음/푸른숲 옮김

혼자 떠나는 여행에 말동무가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한권의 책은 훌륭한 동행자의 역할을 해내고도 남는다.

아일랜드 여행에 동행했던 '슬픈 아일랜드'나 영국의 하워스에서 읽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비엔나에서 읽었던 슈니츨러의 '꿈의 노빌레', 교토 여행에 함께 했던 하이쿠 시집 같은 것들.

얼마전 휴가와 출장을 겸해서 북경과 몽골을 다녀왔는데, 이번 여행의 동반자는 중국 작가 위화가 쓴 '허삼관 매혈기'였다. 중국 서민들의 삶을 경쾌한 필치로 써내려간 이 책은 특히나, 너무나도 재미있어서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한 줄도 몰랐다. 그러니 이보다 더 좋은 말동무가 있을까?

위화는 1960년에 태어난 젊은 작가로, 중국 제3세대 작가에 속한다고 알려져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자기 내면에 천착하여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면 소설을 써내는 것과 달리, 위화는 중국인의 삶, 그것도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고있는 서민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의 두 번째 작품 '살아가는 것'은 장이모우 감독의 영화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허삼관 매혈기'는 생사공장 노동자 허삼관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들을 부양하며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피를 팔아야했던 사연을 그린 이야기다. 피를 판다고 하니, 뭔가 굉장히 비참한 비극들이 연달아 터져나올 것 같지만, 사실은 희극에 가깝다.

허삼관과 그의 주변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가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것들이다. 그 옛날 대문을 열어놓고 내집 네집 구분없이 살아가던 우리네 골목길에서 들었던 것들이다. 촌스럽고 기막히고 때로는 쌍스럽기도 하지만, 삶 속에 녹아있는 진실들이 툭툭 튀어나오던 말들, 바로 허삼관 매혈기의 인물들이 떠들어대던 소리들이다.

위화 특유의 간결한 문체, 거침없는 표현들 속에서는 위트와 해학이 넘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책을 읽다가 낄낄 웃게 되지만, 이내 마음이 싸해진다. '허삼관 매혈기'는 희비극인 것이다. 우리네 밑바닥 인생이 그러하듯.

북경에 도착해서 후통(골목길)을 많이 돌아다녔다. 우리네 6,70년대 골목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수많은 허삼관을 보았다. 그들은 후통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고, 때로는 마작이나 장기를 두기도 했다. 푹푹 찌는 북경날씨에 웃통을 벗어던지고 욕을 하며 이웃들과 싸우기도 했다. 여행의 동반자 '허삼관 매혈기'가 나에게 미리 그 풍경을 펼쳐보여줬던 것이다.

이진이(대구MBC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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