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 서리 오고 햇빛 나는 날

김장채소와 가을상추가 제법 자랐다. 잦은 이슬비와 아침 이슬 덕택이리라. 가을상추는 하도 맛이 좋아 문 잠그고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서리 오면 채소부터 서둘러 거둬야 한다. 서리 오고 햇빛 나는 날엔 누구든 분주해진다.

이때 햇빛 나는 시간이 오죽 짧으면 '햇덧'이라고 했겠나. 해 기울면 그늘은 성큼 한 걸음에 내려온다. 고추잠자리처럼 파닥거리던 햇살도 어느새 땅거미에 묻혀 버린다. 가을해 떨어지면 다가드는 건 오소소 돋은 소름뿐이다.

서리 온 날 해 짧은 것을 보면 우리 삶이 초로(草露)라는 말이 그르지 않다. 삶이 초로라면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붙들어 맬 것인가. 가을에 우리 모두 외로워지는 것은 삶이 이슬처럼 증발해버려서일까. 윤동주도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 서 있음을 보곤, 삶의 속절없음을 느꼈으리라.

그런데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감상적이다. 서경덕의 말대로 '마음이 어린 후'에 떠오르는 생각이다. 문제는 초로든 채소밭이든 시간 따라 흐르는 사물을, 흐르는 그대로 마음에 담지 못하고, 매번 계절 앞에서 민망해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절이든 물이든, 흐르는 것을 정지시켜 그 '껍질'만 마음 곳곳에 저장할 뿐, 진짜는 늘 놓치고 만다. 우리가 저장한 것은 사물의 잔영이고 기억일 뿐이다. 그러나 우습게도, 우리는 그 잔영이 많고 적음에 따라 우리의 교양과 인격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그 잔영을 씻고 말리고 포장하여 쉽게 돈과 맞바꾼다. 즉 거두절미한 서로의 '앎'을 끝없이 주고받는다. 사실 '문화'라는 거창한 이름도 바로 이 앎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우리가 동물처럼 앎에 대한 집착만 버린다면, 우리는 실개천과 같이 자유로울 것이고, 새처럼 만물과 교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을 밤 귀뚜라미와 함께 크릭 크릭 크릭 우주 저 끝까지 고독과 기쁨을 나누고, 나무처럼 24절기마다 옷을 바꿔 입을 것이다. 길을 나서면, 쑥부쟁이의 해말간 얼굴이 신의 메시지를 가지고 달려 올 것이고, 졸졸졸 개울물도 찌든 마음에 청량제를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옹졸하다. 가을 공기가 수정처럼 맑아도 우리는 앎의 채널만을 고집한다. 우리는 진정한 사물의 흐름을 놓쳐놓고도, 그 놓친 것을 아까워할 줄도 모른다. 우리는 서리 오고 해 짧은 나날이 다 빛나는 스냅사진이고, 지혜의 리듬임을 깨닫지 못한다. 오로지 삶은 초로라는 공식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 꽃과 개울물 소리도, 월터 페이터의 말처럼, 피륙의 날과 씨가 무늬를 만들 듯, 몇 가지 원소가 잠깐 동안 모여 빚어놓은 무늬일 뿐이다. 이 무늬는 곧 질소·산소·석회 등으로 분해될지 모르고, 분해된 것은 다시 어느 흐르는 무덤에 할미꽃을 피우거나, 여름날에 소나기구름을 피울지 모른다. 그 원소는 또 거미에겐 은실꾸리를 제공하거나, 창포 뿌리엔 가득 향료를 넣어줄지 모른다.

찌륵 찌륵 찌륵… 귀뚜라미는 앎을 수확하여 노적가리로 쌓지 않는다. 귀뚜라미는 우주를 직관하는 즉시 게송으로 읊어버리지, 억지로 앎의 창고를 만들지 않는다. 아니, 귀뚜라미에겐 앎이랄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귀뚜라미는 인간보다 지혜로울 때가 있다. 끼륵 끼륵 끼륵, 그것은 가을 밤 내내 달과 교신하고, 멀리 은하수와 전파로 교감하는 소리가 아닌가.

생각해보면, 지각하는 사물을 다짜고짜 앎의 못에 던져 넣는 건 인간뿐이다. 또 삶이 짧다 어떻다, 투덜대면서도 서리 오고 햇빛 비치는 날에 늦잠 자는 것도 인간뿐이다. 앎의 흙더미 때문에 수정 같은 가을햇빛을 못 보는 것도 인간뿐이다. 모든 시인과 사제는 지금부터라도 순간순간 몸 바꾸는 만상의 비밀을 산 채로 포획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한 예술과 문화의 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가운 서릿바람이 불기 전에 말이다.

박재열(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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