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정생 그, 그의 집은...

강아지 똥, 몽실언니의 작가 권정생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다섯 달이 지났다. 사람은 집에 의지하고, 집은 사람에 의지하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떠난 집은 을씨년스럽고 허물어지기 십상이다. 올 여름 끝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멋대로 자란 잡초를 예상했는데 선생의 집 마당은 깔끔했다. 누군가 시간과 공을 들여 잡초를 베어낸 게 틀림없었다.

남안동IC에서 선생이 살던 조탑동까지는 자동차로 2분이면 충분하다. '안동 조탑동 5층 전탑' 자리를 알리는 표지판 옆에 자동차를 세우고 조금 걸으면 된다.

여느 시골마을과 달리 조탑 주민들은 외지인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권정생 선생이 살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주중에도 발길이 끊이지 않고 주말엔 북적대기도 한다고 했다. 관광버스를 대절해 단체로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했다. 선생의 집 섬돌에는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권정생 선생의 집을 찾지만 근처에는 아직 간이화장실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선생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 초입에 사는 지술영씨는 "사람들이 먼길을 달려와 맨 먼저 찾는 곳이 화장실"이라고 했다. 그녀는 '조탑동 5층 전탑' 앞 너른 공터를 가리키며 "간이 화장실 1,2개쯤 세워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조탑동 5층 전탑 안내판' 아래 임시로 만들어놓은 간이 안내판 대신 눈에 잘 띄는 안내판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선생의 집은 골목 끝에 자리잡고 있다. 집에는 대문이 따로 없지만 대문이 있을 법한 자리에는 '상여집'이 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썼던 '상여' 보관소인 셈이다. 권정생 집을 찾아왔다는 한 방문객은 집 앞에 화장실 같은 게 있어 뭔지 들여다보았더니 '상여가 있더라.'며, 다른 곳으로 옮기면 좋겠다고 했다.

조탑동에는 선생이 종지기로 일했던 일직교회가 있으나 교회에서 선생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1987년 교회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선생이 종을 치던 종각도 헐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종을 치는 대신 차임벨을 쓴다고 했다.

일직교회 이창식 목사는 "선생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교회에 와도 보여드릴 게 없어 죄송하다."며 "종각을 복원하고 싶지만 시골의 작은 교회라 여력이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조탑 주민들은 한 달쯤 전까지는 선생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은 발길이 뜸해졌고, 주말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전했다.

◆ 집=짐작은 했지만 선생의 집은 생각보다 훨씬 허름했다. 흙담 위에 슬레이트를 올린 지붕이 그 오랜 세월 여름 비바람과 겨울눈을 어떻게 견뎠는지 의아하다. 황토 빛 양철 슬레이트 지붕은 일직교회를 새로 지을 때 나온 폐품을 얹은 것이다. 선생은 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위태한 집이 안타까워 주변에서 수리 좀 하자고 종용했지만 끝내 거절하셨다.

선생은 집에 그 흔한 냉장고 하나 들여놓지 않았는데, 보다 못한 이오덕선생(아동문학가, 2003년 작고)이 몇 해 전 작은 헌 냉장고를 구해 억지로 들여다 놓았다. 그때까지 선생은 무더운 여름을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더불어 지냈다. 권정생 선생이 자신의 사후 일을 일임한 3 중 한 사람인 박연철 변호사는 "80년대 선생님을 처음 뵈었는데 한 달에 2만원이면 생활이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쌀을 사야 하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쌀은 찾아오는 사람들이 한 봉지씩 가져오니까 충분하다.' 고 하셨어요." 라고 전한다.

일직 교회 이창식 목사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선생은 자신을 위해 한 달에 10만원도 안 쓰셨다."고 했다. 박 변호사는 "통장에 인세가 들어오는데, 돈이 나간 흔적은 거의 없다."고 선생의 검소한 삶을 전했다. 선생의 집에는 그 흔한 세탁기 한 대도 없었다. 오래된 '한일 짤순이(탈수기)' 한 대가 선생의 삶을 전하려는 듯 오도카니 서 있고, 마당 가운데 솥 하나 덩그러니 앉아 있다.

◆ 집 앞= 마당 가운데 개나리 나무가 우거져 집을 살짝 가리고 있다. 대문이 따로 없는 집이라 우거진 개나리가 집과 밖을 구분해주는 듯 하다. 마당 입구 오른쪽에는 뽕나무와 산수유나무, 느티나무가 제법 울창하다. 좁은 집터에 나무 종류가 다양하다. 은행나무는 암수를 함께 심지 않았는데도 드문드문 열매가 달렸다. 산수유는 붉게 익었는데 따는 사람이 없다.

권정생 선생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몸담고 있던 교회의 나무들이 베어질 때, 선생이 어린 대추나무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톱질을 멈췄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진다.

◆ 개나리 아래 개집=선생의 작품 '강아지 똥'은 너무나 유명하다. 서른 안쪽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았을 책이다. 개나리 나무 아래 강아지 집이 '강아지 똥'의 주인공이 살던 집은 아닐 것이다. 개집에 빗물이 들지 않도록 우거진 개나리 가지 아래 두었다. 개는 오래 전부터 살지 않은 듯 했다.

◆ 문패=선생님의 남루한 오두막에는 마분지에 친필로 쓴 '권정생' 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었다. 조탑동 일직교회 이창식 목사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누군가가 떼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는 "지금 붙어 있는 문패는 원래 문패가 아니라 누군가 새로 써 붙인 것"이라고 했다. 유품정리위원이었던 김용락 시인도 '원래 문패가 아님'을 확인해주었다. 마분지에 '권정생'이라고 쓴 오래된 문패가 이 집을 떠나 어디에서 문패 노릇을 할지 궁금하다.

◆ 좁은 방=선생의 집은 대문이 따로 없다. 골목 끝이 곧 마당의 시작이고 마당의 끝이 방문이다. 방문은 하도 낮아 허리를 잔뜩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자물쇠가 굳게 잠겨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나 방 역시 좁고 낮다. 아동 문학가 서정오 선생에 따르면 '키가 좀 큰 사람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서정오 선생은 "다섯 평 짜리 집은 방 두 칸으로 나눴는데 책이 많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만나는 방은 겨우 세 사람이 앉을 정도였지요. 이 방에서 권 선생님은 손님을 맞이하고, 식사를 하시고, 앉은뱅이 책상에서 글도 쓰셨습니다. 안쪽 방 역시 책이 많았는데, 겨우 한 사람이 누울 공간이 있었지요. 선생은 그 방에서 주무셨습니다."라고 전한다.

◆ 빈병들=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 등 선생이 감내해야 했던 질병의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핵1' 이라는 작품에서 '길 가다가도 퍼질러 앉으면/ 앉은 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 차라리 그대로 쑥쑥 빠져 들어가/ 천 길 만 길 지옥 속에라도 빠져들고 싶어라.'라고 했다.

마당에 내놓은 빈 병 중에는 꿀 병이 더러 보였다. 선생을 찾아오는 지인들이 '결핵에 좋다'며 꿀을 자주 사들고 왔다고 한다. 꿀이 결핵에 좋은지 현직 의사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마도 꿀을 사온 이들은 정성을 담아왔을 것이다. 꿀병 외에 반찬을 담았을 것으로 보이는 병들도 많았다. 이웃에서 김치며 밑반찬을 곧잘 만들어 드렸다고 한다. 주민들은 "선생님은 무엇을 드려도 받지 않았지만 반찬을 해 드리면 고맙게 받으셨다."고 전했다. 빈 병이 무척 많았는데, 많이 치우고도 이만큼 남았다고 했다.

◆ 정리된 마당=선생의 집을 찾았는데 마당이 말쑥했다. 지난 여름 끝에 비가 많이 내렸으니 잡풀이 자라도 한참 자랐겠다, 짐작했던 터라 의외였다. 알아보니 선생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 초입에 사는 김준태씨와 아내 지술영씨, 그리고 시집간 두 딸 외경과 순교, 막내 민경이 추석 전날 풀을 베었다고 한다. 고마운 이웃이다.

이웃에 사는 한 할머니는 "선생이 저렇게 일찍 가시니 이제 내 편지는 누가 읽어주나"라고 한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보내온 편지나, 관공서에 우편물이 오면 선생께 들고 가서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던 모양이다. 양파 모종을 내던 또 다른 이웃 할머니는 "좋은 분이고 재주 많은 분인데 너무 일찍 가셨다."며 서운해했다.

◆ 포도=마당에 한 그루 포도나무는 따는 사람이 없어 다섯 송이 포도는 저 홀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오고가는 사람의 발길은 끊이지 않아 섬돌에 국화 두 송이가 얌전히 누워 있다. 주인은 떠나고 없지만 찾아오는 발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수돗가 옆에 한 무더기 국화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터뜨리려는 참이다. 마당 왼편 반평도 되지 않을 밭에는 선생이 마지막으로 씨뿌렸을 정구지가 자라고 있었다.

◆ 일직교회1=선생의 집 마당에서 왼편으로 멀리 보인다. 비닐 하우스 뒤의 희미한 첨탑이 일직교회 첨탑이다. 동네 사람들은 '권정생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권경수 집사님'이라고 불렀다. 일직교회 이창식 목사는 "선생이 동네와 교회에서는 '경수'라는 어린 시절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호적에 선생의 이름은 '권정생'이다.

◆ 일직교회2=선생은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들어와 교회 문간방에 머물며 종지기가 됐다. 20여년 전 교회 뒤쪽 빌뱅이 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나가기 전까지 17년 동안 교회에 기거하며 종을 쳤다.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맨손으로 종을 쳤다. 교인들이 장갑을 사다드려도 장갑을 끼지 않았다. "장갑을 끼고 종을 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종소리가 갈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일직교회는 1987년 다시 지은 것이어서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선생의 흔적을 찾아 교회로 왔던 방문객들은 다소 실망한 얼굴로 돌아선다.

◇ 그가 살던 집을 가려면

남안동IC를 나서면 곧 두 갈래 좁은 길이 있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조탑동이다. 통일신라시대 전탑이 있는 동네여서 조탑동이라고 불린다. IC에서 자동차로 1,2분 정도만 더 가면 '안동 조탑동 5층 전탑'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그 아래 '작가 권정생 선생 살던 집'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다. 길 오른 쪽 너른 터에는 신라시대 탑이 있고, 맞은편골목으로 100m쯤 걸어가면 막다른 집이 선생이 살던 오두막이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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