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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그때가 있었기에 우린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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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쉬운 질문일 줄 알았습니다. 원유 가격 폭등에 따른 장기적 대책과 대체에너지 개발 가능성을 묻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온통 들끓게 하는 한반도 대운하가 필요한지 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피식 한 번 웃고 나서 수월하게 대답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이 그토록 당혹스럽고 난감한 표정이 될 줄 미처 몰랐습니다. 끙끙 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턱에 손을 괴고는 로댕의 조각상으로 변해버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수능시험이 나을 뻔했습니다.

'당신에게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바로 이 물음을 던졌습니다. '에이, 뭐 그런 질문을 갖고 그래?', '별것도 아닌데 잔뜩 뜸만 들였네.'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시시한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답을 주시렵니까?

◆앞으로 다가올 순간이 바로 최고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에서 영감을 얻어 거리로 나섰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취지를 설명한 뒤 앞서 물음을 던져보았다. 나름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이들 중 20명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나마 한마디라도 답을 건넨 이는 절반밖에 안됐다.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사람 중 몇몇은 '별걸 다 묻는구만.'이라는 싸늘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재촉했고, 다른 이들은 '음….', '글쎄….'를 연발하다가 끝내 "아직은 모르겠어요. 미안해요."라며 발길을 돌렸다. 무엇이 미안한지는 채 물어볼 시간도 주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걷던 커플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만난 순간"이라고 답했고, 올해 대학에 들어간다는 장순호(20) 군은 "재수 끝에 의대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라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섯 살 난 딸아이와 함께 백화점에 나왔다는 주부 조성미(35) 씨는 엉뚱하게도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4강에 올랐을 때"라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때 거리 응원을 나왔다가 지금 남편을 만났다."며 수줍게 웃어보였다. 20대 청년은 "아직까지 최고의 순간은 없었는데, 아마 취업에 성공하면 그때가 최고일 것"이라고 말했고, 멋진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는 "그런 질문을 받으면 마치 인생을 다 산 것 같아 서글프다."면서 헛헛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는 "사는 게 고달픈데 무슨 최고의 순간"이냐며 외면했다. 하지만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는 기자가 불쌍했던지 "내일은 더 낫겠지 하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이야. 최고 좋은 시간이 벌써 지났으면 사는 재미가 없잖아?"하며 말끝을 흐렸다.

◆너무나 고마운 두 아이를 갖게 된 순간

지금껏 살아온 생애를 곰곰이 되짚어볼 질문을 길을 걷다 졸지에 접했으니 답을 못하는 게 당연지사. 얼핏 떠오르는 생각은 이내 다른 추억으로 밀려나고, '과연 그 추억이 최고였나?'하는 스스로의 물음에 그 역시 힘없이 자리를 내주고 만다.

맥주 한잔을 기울이며 이웃 사람들과 나눈 '최고의 순간' 대화도 역시 쉽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 표정에는 의아함과 당혹감이 광속으로 교차했다. 길게만 느껴지던 숙고의 시간이 지난 뒤 위층 아주머니가 말을 꺼냈다. "두 아이를 낳았을 때 최고였죠. 서른다섯 살에 낳은 둘째 딸은 너무 고마웠습니다. 병원에서 돌아오며 혼자 웃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머니의 첫째아이는 일곱 살 터울이 나는 아들. 다른 아주머니도 말문을 연다. "이게 최고의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 시절,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쑥쑥 올랐어요. 그때 기분이란…." 옆자리 다른 아주머니는 "남편과 연애할 때 시내 레스토랑에서 이벤트를 마련해 줬는데, 지금도 참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며 웃어보였다. 위층 아저씨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직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어. 앞으로 올거야."

최고의 순간을 말할 수 있었던 이들은 참 행복합니다. 지금이 바로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 역시 행복합니다. 아직 최고의 순간이 오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들 또한 기대감에 부풀어 행복합니다. 살아가며 최고의 순간이 단 한 번 오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까지 최고였을 뿐, 앞으로 더 멋진 최고의 순간이 펼쳐질 겁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은 계속 살아갈 만한 것, 아닐까요?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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