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중반 뉴스의 초점이 됐던 상주 효자 정재수(당시11세)군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도동환(70·민족문화영상협회장) 회장이 20일 상주 효자 정재수 기념관(상주시 화서면)을 찾았다. 자신이 기획, 제작한 영화현장을 33년 만에 찾아온 것.
하얀색 슈트에 짙은 남색 드레스셔츠로 멋을 낸 노신사는 정재수 기념관 곳곳을 둘러봤다. "그 당시 서울에서 직접 정재수군의 어머니를 찾아와 영화제작 허락을 받았다"고 회상하며 감회에 젖었다.
전 국민의 심금을 울렸던 대구 이윤복 소년가장 이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도 도 회장이 기획한 작품이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후 첫 작품이다. 이를 시작으로 이상의 '날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총 38편의 영화를 기획, 제작한 우리나라 영화계의 산증인이다.
평생 영화인으로 살면서 인생의 굴곡도 많았다. 1969년 대종상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당시 거목이었던 신상옥 감독에게 빼앗긴 후 오로지 신 감독을 이겨보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는 것. 신 감독에게 이겨보자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결국 예술성으로는 안 된다"고 판단, 작품성으로 도전하기로 결심, 1969년에 '상해임시정부 백범 김구선생'이란 대작을 찍어 추석에 개봉했다. "당시에 영화 한편 만드는 데 드는 돈이 500만~600만원 정도였는데 백범 김구선생 제작에는 9천500만원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도 회장은 이 한편의 영화를 만든 후 모든 것을 잃었다. 관객동원에 성공했지만 영화제작자로서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빈털터리가 됐다.
상주 함창읍이 고향인 도 회장이 평생 영화인의 삶을 살게 된 배경은 대학시절(당시 대구대) 연극반에서 기획을 하며 당시 연극 연출가 최현민 선생과 인연을 맺었던 것이 계기가 됐다. "군제대 후 대학 3학년 때 서울 영화사에서 전화가 왔어. 명덕국교 5학년 담임 김동식 선생을 찾아가 무조건 이윤복군의 수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의 영화 판권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당시로선 큰돈인 10만원을 주고 판권을 확보했지." 다음날 서울 신필름 관계자와 한양영화사 부사장이 잇따라 내려와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기도 했다는 것.
"대구 아세아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첫날부터 정말 중앙통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등 초대박이었지. 유치원생부터 할아버지까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윤복이 영화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효자 정재수군의 영화도 우연한 기회로 시작됐다. "1975년 구정 후 TV를 보고 있는데 정재수군 부자가 외가를 다녀오던 중 눈 쌓인 고갯길에서 변을 당했다는 뉴스를 본 것이 계기가 됐지." 정군이 눈길에 쓰러져 잠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애쓰다가 자기도 아버지 곁에서 함께 얼어죽었다는 뉴스를 보고 그 효성에 감복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다음날 충무로에 나가서 한진영화사 한갑수 사장에게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 이튿날 곧바로 상주로 내려와서 정군의 모친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것. 영화는 만들었는데 감동적인 타이틀이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다가 당시 아이들이 많이 불렀던 동요 '아빠하고 나하고'에서 따와 제목을 달았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해 우수영화로 선정됐다.
마지막 작품은 1992년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기획 제작한 것이다. 이 영화는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92년 제16회 캐나다 몬트리올 세계영화제 최우수제작자상, 제12회 하와이 국제영화제 동서문화상(작품상), 제13회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상복이 터졌다.
도 회장은 이제 마지막 꿈이 있다. 마지막 정열을 다 바쳐 '인간 박정희' '종군 위안부' '안중근의사' 등을 꼭 만들고 싶어한다.
상주·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