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습니다. 덩치 작은 이 녀석의 식탐이 대단했습니다. 양에 관계없이 먹어댔습니다. 너무 많이 먹은 나머지 배가 볼록 튀어나오고 다리마저 휘어버려 잘 걷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친척 어른이 '짜고났다'고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짜고나다'는 식탐 때문에 몸에 탈이 나는 것을 일컫는 경상도 말이지요.
식탐의 화신으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빼놓을 수 없지요. 매끼마다 그는 8개의 식탁에 차려진 성찬을 즐겼습니다. 한 식탁에 8개의 접시가 얹혔으니 한끼 식사로 64개의 접시를 비운 셈이지요. 너무 많이 먹어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거위털로 목구멍을 자극해 게워낸 뒤 다시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많이 먹는 만큼 하루에 십수차례씩 볼일을 보는 바람에 화장실은 그에게 중요한 업무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지난해 7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불어닥친 미국의 신용경색 여파로 전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 이면을 살펴보면 달러 패권을 무기로 하는 미국의 식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은 소비로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생산은 하지 않고 남의 나라 물건을 수입해와 소비해대니 천문학적인 무역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큰소리 떵떵 칩니다. 비결은 '달러'입니다. 달러를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미국은 적어도 외환 위기(달러 부족)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2000년 이후 경제난에 봉착할 때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달러를 풀어 이를 모면해 왔습니다. 링거만 거듭 놓은 것이지요. 달러가 넘쳐나면서 달러화 가치가 폭락하자, 이를 벌충하기 위해 투기세력들이 원자재 시장으로 몰려들었고 이는 물가폭등으로 이어졌습니다. 미국민들이 소비 파티를 계속 즐기기 위해 달러를 푼 데 따른 후유증 때문에 세계 각국이 '단체기합'을 받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번 신용경색을 통해 드러난 것은 월(Wall)가 금융시스템의 어처구니없는 후진성이었습니다. 2000년 이후 미국의 금융회사들은 신용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집값보다 많은 대출을 해줬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담보 대출 증서를 기초로 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여기저기 팔았습니다. 미국인들조차 '집값은 언제나 오른다'는 환상에 젖어, 담보로 빌린 돈을 흥청망청 써댔습니다.
선진금융이니 헤지(위험관리)니 그럴싸한 수사로 포장되어 있지만 파생상품이라는 것은 결국 실체없는 돈놀이일 뿐입니다. 파국을 예고하는 거품이 터지기 전까지 미국의 금융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없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을 먹여살리는 유망성장산업으로 추켜세워지던 월가의 금융산업은 결국 거품과 부실을 사고파는 탐욕의 투기게임의 다른 이름이었던 겁니다.
실물 경제의 뒷받침 없는 금융산업의 비대한 팽창은 재앙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선물·옵션 파생상품 시장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이 걱정스럽습니다. 현물시장의 몇배 규모나 되는 파생상품시장 때문에 국내 증시는 투기판으로 전락한 지 오래입니다. 정부 당국은 미국 금융시장 붕괴의 직접적 원인이 파생상품의 과열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새겨야 합니다. 당장은 지금 미국발 금융 홍역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회사들이 '짜고나지' 않도록 파생상품시장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그 규모도 줄여야 할 것입니다.
김해용 기획취재부장 kimh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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