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권]제주도가 볼 것이 없다고?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왔다. 렌터카를 이용한 제주도 일주는 그야말로 주마간산. 내비게이션을 한 30분 들여다보다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려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둘러보고 또다시 승차, 다음 목적지 입력. 시간에 쫓겨 그 짓을 반복하다 보니 왠지 그 설본 풍광들에게 못내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서명숙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같은 책을 보면 그 섬과 그 섬의 사람들에게 더 죄송해진다. 그녀에 의하면 제주도를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스쳐지나간 주제에 제주도를 '비싸기만 하고 볼 것도 없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실례다.

그곳에서 나는 갈대처럼 흔들리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바람의 존재를 느꼈다. 하늘의 구름도, 바다의 물살도, 오름의 들풀도, 억새도, 망아지의 갈기털도 죄다 흔들림 속에서 존재했다……. 그날 송악에는 모든 것을 무화한, 바람만이 존재했다.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 서명숙, 박성기 지음/북하우스/1만5천원/436쪽

아무리 주마간산이라 해도, 인공 관광지보다는 역시 '산'을 봐야지 했다. 그래서 수월봉에서 송악산으로, 또 산방산으로, 그렇게 대충이나마 절경을 타본다. 이곳들은 역사적인 명승지인데, 이상하게 돈도 안 받는다. 먹을 게 지천에 널려 있어 느긋한 말들만이 간간이 공짜 관광객인 나를 감시한다.

산방산 자락은 바로 용머리 해안이다. 1653년 하멜은 바로 이곳에 표류해왔는데, 그가 처음 본 제주도의 경치가 바로 영묘한 산과 기괴한 '코지'라 생각하니 그는 제법 풍류가 따라주는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일당들은 당시의 조선에서 고생깨나 했었지만, 적어도 처음 제주에서만은 인심 좋은 환대를 받았던 것 같다.

그 총독(제주 목)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우리에게 향연을 베풀어 우리의 시름을 달래 주려고 노력했다. 그는 또 부상자도 치료받도록 조처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이교도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 지음/김태진 옮김/서해문집/6천700원/142쪽

용머리 해안을 돌다 보니 '할망'들이 전복과 한라산 소주를 팔고 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신발창 앞까지 들이치는 파도를 무릅쓰고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게 그래도 진짜 해녀들만 할 수 있는 장사여. 나라에서 우리들만 하라고 허가했지. 그녀들의 눈은 순간 자부심으로 빛난다. 나는 열세 살 때부텅 물질을 했어. 근디 이제는 아무도 안 해.

외지인들에 의해 거대한 골프 코스로 변해 버린 화산섬. 그곳의 바위틈 사이에서 이제 곧 전설이 되어 버릴 현역들이 찬란한 은빛 껍데기를 바르고 있다. 마지막 해녀들의 짠 주름이 어느 테마파크보다 리얼하다. 만원짜리, 그 '독점' 소주가 슬프도록 깨끗하다.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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