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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 자판기]세계 최초 자판기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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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15년 설치된 성수(聖水)자판기 시초

점심 식사 후 직장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는 샐러리맨, 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리는 서민들의 손에 흔히 들려있는 것이 자판기 커피다.

사람들이 길다방 커피로 부르는 자판기 커피의 가장 큰 매력은 부담없이 뽑아 마실 수 있다는 점이다. 유명 커피전문점 커피 한잔 가격이 웬만한 한끼 식사 가격을 넘어서면서 저렴한 길다방 커피는 더욱 사랑받고 있다.

자판기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상품을 판매하는 장치를 말한다. 동전이나 지폐를 넣고 원하는 물품을 선택하면 물품이 나오는 일종의 '무인 점포'로 기계 문명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부산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판기 역사는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됐다. 유래를 추적하려면 2천년 이상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계 최초의 자판기는 BC 215년에 등장했다. 이집트의 한 사원에 설치된 '성수(聖水)자판기'는 경화(硬貨)를 올려 놓으면 그 무게로 구멍이 열려 성수가 흘러나오도록 설계되었다고 전해진다. AD 1세기경에는 주화를 넣으면 정화수를 받을 수 있는 장치가 그리스의 한 사원에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상업용 자판기는 18세기 영국에서 등장해 코담배, 잎담배 등을 판매하는데 주로 사용됐다. 18세기 후반에는 영국의 식민지에도 자판기가 보급됐다. 실용적인 상업용 자판기는 1888년 뉴욕시 고가철도 플랫폼에 설치된 껌 자판기가 효시다. 미국 자판기 사업은 1920년대 중반까지 사탕을 판매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으나 담배자판기가 등장하면서 현대식 자판기의 신기원이 열렸다. 1930년대에는 청량음료를 파는 자판기가 나왔다.

1935년 최초의 표준 동전 투입식 코카콜라자판기가 등장하면서 코카콜라는 미국 자판기의 대명사가 됐다. 미국이 2차세계대전 참전을 앞두고 방위력 증강을 위해 공장 가동률을 높이기 시작했을 때 자판기는 노동 능률을 높이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됐다. 미국에서 자판기가 근대 유통의 중요한 장비로 등장한 시기는 1940년대부터다. 1940~50년 주로 회사와 공장에 설치되었던 자판기는 1950년대 식당을 대체하거나 보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한 종류의 식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커피자판기는 1947년 미국에서 처음 출시되었으며 원두커피 자판기는 1981년 일본에서 개발, 전세계에 보급됐다.

자판기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자판기 천국'으로 불리는 일본이다. 일본은 인구당 자판기 수가 가장 많은 나라로 자판기가 소비하는 전력이 전체 소비량의 5%를 차지한다. 청량음료나 담배는 전체 판매의 40%가 자판기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1890년 일본에 상륙한 자판기가 화려한 꽃을 피운 셈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 자판기는 메이지무라박물관에 전시된 1904년산 우표자판기다.

일본에서는 정기적으로 자판기 종합전시회가 열린다. 최신 기술의 자판기와 함께 이색 자판기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자리다. 터치스크린이 설치된 자판기를 비롯해 태양열을 활용한 자판기, 미성년자 담배 구매를 막기 위한 안면인식자판기 등 일본은 한발 앞선 기술로 세계 자판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안면인식자판기는 자판기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디지털 카메라)에 얼굴을 비춘 뒤 버튼을 눌러 스캔을 하면 10만명의 얼굴 정보가 입력된 인증시스템이 피부 탄력, 눈가 주름 등을 측정해 성인 여부를 식별하는 원리로 작동된다.

또 '웬만한 것은 다 판다. 일본에 없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다양한 물품을 자판기로 구입할 수 있다. 커피'담배'음료는 기본이고 곤충'지도'꽃다발'우산'속옷'계란'토마토'우동'스넥 등을 자판기로 쉽게 살 수 있다. 심지어 보험회사에 가지 않아도 여행자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여행자보험자판기와 데이트 파트너를 소개해주는 자판기도 있다.

'일본 사람들은 전철역에서 자판기를 통해 표를 산 뒤 자판기 캔커피처럼 전철에 실려 회사로 향한다. 오전 내내 자판기처럼 업무를 토해 낸 뒤 점심때가 되면 자판기에서 도시락을 뽑아 먹고 자판기에서 산 담배와 커피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퇴근 후에는 자판기에서 소개 받은 여자에게 자판기에서 뽑은 장미꽃을 선물한 뒤 자판기 같은 사랑을 나누다 자판기 같은 집으로 돌아와 내일 팔려 나갈 캔커피처럼 잠을 잔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만큼 일본의 자판기 문화는 발달해 있다.

한국에 자판기가 처음 도입된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다. 불과 30여년만에 공공시설'터미널'유원지'숙박업소 뿐 아니라 심지어 산꼭대기까지 진출한 자판기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돼 버렸다. 콘돔(1973년)과 커피(1977년)로 시작된 한국의 자판기는 음료'식품'티켓'엽서'양말'휴지'신문을 넘어 다양한 상품까지 판매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사진 촬영에서부터 편집, 인화까지 할 수 있는 멀티포토자동판매기와 두루마리우표를 판매하는 자동판매기도 나와 있다. 우편물 요금만큼 동전을 투입하면 자동판매기에서 우표가 술술 풀려 나온다. 두루마리우표의 특징은 좌'우 또는 상'하에 천공(우표를 떼어내기 쉽도록 뚫어 놓은 구멍)이 없다. 우표가 풀려 나오는 과정에서 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자판기의 급속한 증가는 대량 생산 및 소비 문화를 충족시키기 위해 출연한 유통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곳곳에 슈퍼마켓'쇼핑센터 등이 생기면서 자판기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고객만족 서비스 개념이 중시되면서 각 영업점의 자판기 보급으로 대중들 삶 깊숙히 파고 들었다. 인건비 상승과 인력난도 무인으로 운영되는 자판기 보급에 한몫했다.

특히 한때는 소자본 창업 아이템으로도 각광 받았다. 목 좋은 곳에 자판기를 설치해 놓으면 자식 학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금서 팔고 바텐더 없이 칵테일 제조…자판기로 이혼서류도 뽑아요

자판기와 관련된 재미 있는 이야기도 많이 전해오고 있다. 영국에서 출판의 자유가 확립되기 전 1822년 리처드 카릴리라는 도서 판매상은 일종의 금기 도서를 판매하기 위해 책 판매기를 만들었다. 그는 사람들이 판매기를 통해 금서를 구입하면 그 책에 대한 판매를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법원은 카릴리가 고용한 종업원 한 사람을 불온 도서 판매 혐의로 감옥에 보냈다고 한다.

바텐더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판기도 있었다. 1971년 9천960달러에 판매된 '일렉트라 바'라는 자판기는 칵테일을 매우 정확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판매한 주류의 양과 판매액까지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고객이 주화를 넣고 황소의 두 뿔을 아래로 잡아 당기면 황소가 고객의 손수건에 향수 콧김을 뿜어주는 자판기와 불이 붙여진 담배를 한 개피씩 판매하는 자판기도 역사의 한 페지를 장식했다.

20세기들어 미국 유타주 코린시 주민들은 지방 법률회사 명칭이 인쇄된 이혼서류를 자판기로 살 수 있게 됐다. 이혼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판기에서 구입한 서류를 작성해 변호사에게 제출하면 되었다. 자판기가 이혼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용도로 사용된 경우다.

자판기로 유명해진 곳도 있다. 강원도 강릉 안목해수욕장 일대는 탁 트인 해안도로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해안 상가 따라 커피자판기가 도열, 속칭 '길 카페'라는 애칭으로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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