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사 정현주의 휴먼 토크]장미꽃 한다발

"원장님! 꽃바구니가 왔는데 발신인 주소가 없어요."

20여명의 아가씨들이 근무하는 병원이니 만큼 많은 핑크빛 사연들이 오고간다. 진료 받던 젊은 총각환자와 눈맞아 (?) 결혼한 간호사, 환자의 선물 공세에 시달리는 예쁜 원무과 직원 등 다양한 사연들이 떠돌아 다닌다. 밸런타인 데이, 크리스마스 등 로맨틱한 날에는 선물꾸러미, 꽃다발 배달로 택배기사가 수시로 드나든다. 남자친구와 백일 기념 꽃다발이라며 외래 입구를 장식하는 장미꽃 백송이 다발에는 신기하다 못해 식상한지 오래다. 섬겨야 하는 기념일과 이벤트 날이 얼마나 많은지 나처럼 분위기에 싱거운 사람은 요즈음 시대라면 연애도, 결혼도 못할 뻔했다.

많은 선물 배달에도 한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던 미지근한 중년 부인의 원장이 발신 미상의 꽃다발을 받은 것이 꽤 묘했던지 직원들이 오며 가며 인사를 건넨다.

며칠 후 직원이 "원장님 며칠 전 꽃다발 보낸 분이라면서 전화 왔어요! 원장님 매일신문 글 잘 읽고 있다면서 격려 해주셨어요! 성함과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안밝히셨어요." 겸연쩍고 민망하고 힘이 난다. 두 아들을 가진 대한민국 주부로서,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어정쩡한 규모의 의원 원장으로서 힘겹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다가 만나는 크고 작은 사연들을 넋두리 하듯 엮어가는 나의 글을 칭찬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병원 홈페이지에 상담글을 정리하고 있는데 한편의 메일이 도착했다. "저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늙은이 입니다…"로 시작되는 장문의 메일인데 나의 신문에 게재된 나의 졸편들을 읽고 소감을 적어 주셨다. 수필가로 등단하셨다는 본인의 소개와 함께 자세한 모니터링과 분에 넘치는 과찬을 해주셨다. 전문적으로 글쓰기 수업을 받지도 못했고 문장력이 뛰어난 글도 아닌데 아마추어의 신선함을 애교로 봐주신 모양이다.

결혼을 앞둔 딸의 여드름 흉터를 치료하고자 내원한 어머니가 진료를 마치고 나가면서 "원장님 글 잘 읽고 있어요. 어떨 때는 제 얘기 같아 가슴이 찡해요" 라면서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눈을 찡긋하고 나가신다.

어릴 적부터 활자를 좋아해 인쇄된 것은 닥치는대로 읽는 버릇이 있는데 읽다가 보니 나도 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 생겼다.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 신변잡기도 긁적거리다가 고등학교때는 드디어 잡지사에 투고도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때는 어릴 적이라 내 글이 활자화되는 것이 대견하고 신기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저널리스트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취재하면서 여러 사람 사는 것을 구경하여 잘못 되어가는 일을 알리고, 바로 잡고 싶었던 꿈을 가졌다. 결론은 나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아직도 못했던 길에 대한 아련한 미련과 환상이 있다. 그래서 간혹은 멋진 기사나 취재글을 읽고 나면 그 날 밤 내가 종군 기자가 되어 포탄이 터지는 전장에서 마이크 들고 보도하는 멋진 꿈을 꾸면서 대리 만족하기도 한다.

053)253-0707 www.gounm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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