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송년시론]길이 끝나는 데서 새 길이 열리고…

저무는 해는 새로운 의미 잉태, 비우는 마음으로 또 나아가야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상투적인 말과 새해에의 설렘을 담은 문자 메시지들이 날개를 단 기축년의 끝자락이다.

하지만 기실은 삼백육십오일 중 어느 하루도 다른 하루와 다를 바는 없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의 흐름은 똑같은 걸음으로만 가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내리나 꽃이 피고 져도 영원한 순환의 반복만 거듭될 따름이다.

우리의 삶도 특정한 시간에만 특별해지지는 않는다. 포부와 결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같이 값진 순간들이며, 어느 때든 버릴 건 버리면서 꿈꿀 건 새로이 꿈꿀 수 있는 '길 위의 노정(路程)'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과 정신에 인위적으로 어떤 박자와 리듬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그 뉘앙스가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 그 리듬과 박자는 우리의 삶과 정신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게 하면서 또 다른 활력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일정한 선을 그어놓고, 거기 맞춰 사는 버릇에 익숙해져 있는지 모른다. 낡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하는 때가 굳이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룻날이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관습과 제도 탓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길이 끝나는 데서 다시 새 길이 열리는 이 한 해의 막바지에 섰다. 낡은 게 어떤 것이며, 그것들을 어떻게 떨쳐 보내야 할지, 곧 밝아올 새해에는 어떤 꿈을 꾸면서 어떻게 거듭나야 할지, 겸허하게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올바른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을 삶의 근본으로 삼는 것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온당치 못한 생각을 하거나 난폭한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사회에서 그대로 떠내려가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과 후회할 말들을 늘어놓지는 않았는지, 마땅히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고 진실에서 겉도는 말이나 용기가 없어서 속으로만 삭인 말은 얼마나 됐는지도 성찰해봐야 한다.

스스로 이런 물음들을 던지면서도 자성(自省)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무슨 염치로 새해에 새 꿈을 꾸고 각오를 새로이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자성 부재의 송구영신은 뜬구름이며, 망년회는 망령회(妄靈會)가 되고 말 뿐이다.

더구나 저무는 해는 시드는 해가 아니다. 저문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잉태하기 위해 먼 곳 찾아 나서는 하나의 과정이다. 새벽별처럼 우리 곁으로 거듭나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가 한 해 동안 뭔가를 채우기 위해 허둥거렸다면 이젠 떨쳐내고 비우는 마음으로 다시 나아가야 한다.

되돌아보면 올해는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다. 슬프고 아픈 일들이 비일비재였다. 용산 참사로 시작된 비극은 여배우 장자연 사건, 살인마 강호순 사건, 조두순 여아 성폭행 사건, 경주 관광버스 참사 등으로 이어지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신종플루 공포가 온 나라를 들쑤시고 흔들었으며, 미디어법 처리와 쌍용차 노조 총파업을 둘러싼 갈등과 혼선은 또 어떠했던가.

국력 소모로 치달은 세종시 수정 문제와 4대강 사업 논란, 민생(民生)은 뒷전인 채 정쟁(政爭)으로만 치달아온 정치는 우리를 어지럽고 답답한 수렁으로 몰아넣기만 했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잇따른 영면과 김수환 추기경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선종도 지켜봐야 했다.

온통 신음소리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흔들릴 대로 흔들려 있음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너 죽고 나 살자'식으로 눈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가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 만연, 인면수심의 막가파 범죄 빈발 등 그 어둠은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올해 사자성어가 '방기곡경'(旁岐曲逕)일까.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제대로 헤아려 다스리고 따른다면, '내 편, 네 편의 반목'과 '아래위의 갈등'을 넘어 '위'와 '나'를 향해서도, '아래'와 '너'를 보면서도 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화해와 사랑의 온도가 높아지게 된다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따스해질까.

되돌아보면 이 우울한 세모에 고 김수환 추기경의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씀이 새삼 저 높은 데서 가까이 다가오면서 이 시대의 혼란과 어둠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것만 같다.

이태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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