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아 보아라. 엄동시절에 몸 성히 잘 있느냐? 이곳은 대소간 두루 평안하고 이 애비는 무고하다.(중략) 애비 걱정은 하지 말고 너 몸 간수를 잘 하여라. 이만 줄인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보내셨던 편지글은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훤하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식 때 찾아뵙지 못하고 어버이날에야 겨우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 1992년에 돌아가셨으니 햇수로 벌써 18년째다. 엄청난 삼복더위, 그것도 음력 유월 그믐에 돌아가셔서 애당초 산소의 잔디가 올찮더니 아직까지도 속새를 비롯한 온갖 잡풀이 산소의 주인 행세를 한다. 해마다 벌초 때면 '내년에는 꼭 아버지 이부자리를 갈아 드릴게요'라고 약속했건만 지키지 못한 약속은 해마다 반복된다. 참으로 인내심 많은 아버지다. 산소의 잡풀들과 한참 동안 씨름한 후 깨끗이 단장한 아버지집 앞에서 살아계실 때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막걸리잔을 올리고 모처럼 아버지와 유쾌한 대화를 나눈다. 게으른 아들을 원망하고 나무랄 법도 한데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한잔의 막걸리에 불그레해진 기분 좋은 얼굴로 "객지에서 묵고살기 힘들제?" 하시고 "걱정하지 마라. 다 지 먹을 거는 타고나니까 몸 간수나 잘해라" 하신다. 평생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시다가 가셨지만 그때의 편지 내용처럼 아직도 다 큰 자식들의 먹고사는 문제와 몸 간수가 걱정되시는가 보다.
살아 생전 아버지 이름으로 소유하셨던 논밭 전지가 열 마지기를 넘지 않았고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하면서 빚에 쪼들렸지만 나는 아버지가 한 번도 자식들에게 힘든 내색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땟거리가 없어도 우리 집에 찾아오는 어떤 손님도(거지까지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셨고 아무 소출도 없는 문중과 동네의 일을 내 집 일보다 더 성심성의껏 하셨으며 대처의 형님을 대신해 부모를 섬기시며 효와 형제간 우애의 본을 보여주셨던 아버지시다.
두 아들을 가슴에 묻고 고달픈 삶의 무게로 허리가 90도로 굽어지셨지만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해맑으시고 목소리는 장난기가 넘친다. "돈 많이 벌어서 맛난 것 많이 사오너라" 하신다. 어떻게 살아라고 애써 가르치지 않았지만 살아생전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스승이 되어주신 아버지.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과 곤란에 처하더라도 낙망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매여진 무거운 짐들을 담담히 감당하며 당신의 삶을 통해 세상살이의 본이 되어주신 그리운 나의 아버지!
유별나게 진해 벚꽃놀이를 보고 싶어하셨던 아버지를 위하여 좋은 차에 전용기사를 붙여서 폼나게 벚꽃놀이 행차를 준비해 놓고 아버지를 깨운다.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 벚꽃 구경하러 가입시더. 늦게 가면 이쁜 꽃 다 지고 없구마요." 대답이 없으시다. 한잔의 막걸리에 취하셔서 벌써 잠이 드셨나? 핑 도는 눈물을 애써 감추고 먼 산을 바라본다. 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리운 나의 아버지….
최동욱㈜대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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