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이 새삼스레 사회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4억 명품녀' 덕분이다. 최근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한 그녀는 부모님께 받는 용돈만으로 수억원대의 명품 쇼핑을 하며 호화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소개돼 시청자의 분노를 샀다. 그녀는 "몸에 걸친 것만 4억"이라고 말해 '4억 명품녀'라는 별명을 얻었고, 당시 하고 있었던 목걸이는 2억원, 소유한 차량은 3억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수많은 평범한 서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국세청 세무조사 요청이 쇄도했고, 진위 논란이 벌어지면서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다.
16일에는 명품 쇼핑으로 인한 카드값을 막기 위해 20억원의 사기를 친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시계는 까르띠에, 옷은 구찌, 가방은 루이뷔통, 선글라스는 샤넬, 차량은 BMW 등의 명품 브랜드로 갖춘 이 여성은 일본 국적 재력가 행세를 하며 이웃 주민들을 속여 모두 48차례에 걸쳐 7명의 주부로부터 20억원을 빌려 갚지 않은 혐의다.
도대체 명품이 뭐기에 이렇게 사람들은 '명품'의 욕망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명품을 소비하는 심리의 그 이면을 들여다보자.
◆난 특별하니까요, 돋보이고 싶은 욕망
A(48·여) 씨는 '한정판' '스페셜 에디션'에 유독 눈독을 들인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게 40대를 넘어서면서부터라는 A씨는 "처음에는 남들이 하니까 당연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했었는데, 이제는 나름의 명품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며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제품이나 남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제품보다는 한정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좋다"고 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명품이 흔하디 흔한 것이 돼 버렸다. 루이뷔통의 일명 보스턴백이라고도 불리는 스피디백은 3초백이란 명칭을 얻었고, 구찌는 5초백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그들 속에서 좀 더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은 또 다른 과시의 방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수제작 등을 통해 수량이 한정된 초고가 제품을 손에 넣는 것. A씨는 "요즘은 젊은 아가씨들도 너도나도 명품을 드는 세상인데 내가 그런 사람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며 "이제 나이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이처럼 명품에 대한 집착이 날로 심해져 가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자신의 부(富)를 드러낼 방법이 '사치재 소비'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 주는 지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명품이 되어버린 것. 백화점 매장을 들어서면 직원들은 맨 먼저 고객이 착용하고 있는 의상과 가방 등을 통해 소비여력을 살필 정도다.
이것이 최근에 일어난 현상만은 아니다. 미국의 소스타인 베블렌(1857∼1929)은 일찍이 "남보다 돋보이고 싶어하는 욕구가 소비를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사치품 가격이 오를수록 주변을 의식해 구매욕구는 되레 왕성해진다는 '베블렌 효과'를 일컫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명품 소비 현상을 분석한 '사치의 나라 럭셔리 코리아'의 저자인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부 교수는 명품 소비 과열 현상의 원인에 대해 "유럽 명품 업체들의 전략과 한국의 고유한 체면의식과 신흥 부유층의 성장이라는 특수성이 결합한 결과"라고 썼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그래도 부럽다!
오랜만에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 나가게 된 B(32·여) 씨. 육아 문제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했던 차에 간만에 실컷 자신을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싶어 한껏 들떴다. 그녀는 예전 싱글 시절 사 뒀던 명품 핸드백을 자랑스레 팔에 걸고 모임에 나갔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대화 내내 그녀의 얼굴은 참담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직 싱글생활을 즐기고 있는 친구들은 명품 옷에 액세서리까지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었던 것. 대충만 훑어봐도 1천만원이 족히 넘는 것처럼 보였다.
자존심이 구겨진 B씨는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백화점 매장에 들러 친구것과 똑같은 제품을 찾아낸 뒤 매장 직원에게 "저 옷보다 더 비싼 옷으로 한 벌 추천해 주세요"라고 했다.
이런 심리는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 사이에 공존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따라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 같은 불편함이다. 당시 B씨에게 명품을 판매했던 매장 직원은 "요즘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 낮게 평가되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조금은 무모한 소비를 하더라도 명품을 사서 지위적·경제적으로 높게 평가 받으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따라하기' 심리는 한국사회에 명품의 대중화를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 1%'에게만 허락된 명품이 아니라 평범한 대학생들까지도 명품백 하나쯤은 들고다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로 인해 올해도 백화점 명품 매출은 신장세를 멈출 줄 모른다. 롯데백화점 대구점은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명품 매출이 40% 높은 신장률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롯데백화점 대구점 한 관계자는 "20, 30대 여성 중 명품가방은 80% 이상이 가지고 다닌다"며 "명품에 대한 인식이 직장인들과 학생들에게 크게 확대되면서 신규고객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창출되고 있다"고 했다.
◆내 인생도 명품이 될 것 같은 황홀감
명품을 구매하는 사람들 중에는 명품에 '목을 맨다'고 해도 지나치치 않을 정도로 집착하는 이들이 있다. 경제력이 되든 안 되든 상관없다. 온몸을 명품으로 휘감고 그 속에서 황홀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들에게 명품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된다.
과외 교사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C(26·여) 씨는 "한 달 버는 돈의 70% 정도를 명품 구매에 사용하고 있다"며 "가끔 정말 고가의 제품을 사기 위해 친구들과 명품계모임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이렇게 명품에 집착하는 이유는 "명품을 입었을 때는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된 것 같다"는 것. 현실에서의 나는 초라하지만 내가 소비하는 명품들 속에서는 고급스런 최상류의 인생을 향유하는 것만 같은 환상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C씨는 속옷이나 스타킹 하나도 명품이 아니면 구매하지 않는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는 명품이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패막이'이기 때문이다.
김난도 교수는 이런 소비 심리를 '환상형 소비 유형'으로 분류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을 쓰면 자신이 더욱 예뻐진 것처럼 느껴지고, 명품 핸드백을 들면 좋은 집안의 귀한 자식이 된 것 같은 기쁨을 느낀다는 것. 김 교수는 "이 유형은 현실이나 현재의 자신에 대해 불만이 많은 소비자들과 자기애 성향이 강한 20, 30대 젊은 소비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며 "자기애(나르시시즘)가 인간의 본정이고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이것이 소비를 통해서만 이뤄지고, 그것이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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