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와 들깨는 다보탑과 석가탑의 차이처럼 미묘하다. 우선 화려한 세련미는 참깨와 다보탑이 앞설지 몰라도 단순한 조화미는 들깨와 석가탑을 따라올 수 없다. 성명학적으로 풀어 봐도 들깨와 석가탑(釋迦塔)에는 중후한 무게가 실려 있지만 참깨와 다보탑(多寶塔)에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만 느껴질 뿐 약간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들깨같은 다보탑이 좋아
불국사 법당 앞 돌계단에 앉아 두 탑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다보탑 쪽으로 눈길이 가지만 나중에는 무미건조할 것 같던 석가탑에 시선이 머물고 있음을 늦게 발견하게 된다. 비가 오는 날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함초롬히 비에 젖은 탑신의 피부가 문득 슬픔을 몰고 오는 것 같지만 모든 젖어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낸다면 이내 마음은 평온해 지고 세상은 밝아지기 시작한다. 탑을 바라보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화려한 다보탑보다 석가탑을 좋아하듯 참깨보다는 들깨를 좋아한다. 이들 참깨와 들깨로 짠 기름 중에서도 고소한 냄새가 진동하는 참기름보다 향과 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듬직한 들기름을 더 좋아한다. 김을 굽거나 나물을 무칠 때도 들기름이 더 은근하고 깊은 맛을 낸다.
#각종 반찬'보신탕에 들깨 가루 환상
참깨는 참기름을 짜거나 깨소금을 만드는 단순한 원료에 불과하다. 그러나 들깻잎은 쌈을 싸먹거나 멸치를 넣고 졸여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 소목장이 가구를 만든 다음 나무의 무늬가 드러나도록 밑칠을 할 때 들기름을 사용하고 골기와 집의 쪽마루에도 자주 들기름을 먹여야 윤이 나고 오래 간다.
들깨 가루는 삼복을 이겨내는 보신탕에 넣어 먹으면 제 맛이 난다. 수제비를 끓일 때 국물에 들깨가루를 풀고 들깻잎을 쑹덩쑹덩 썰어 넣어도 한 끼 요기로선 그만이다. 그리고 들깨를 볶아 굵은 소금을 섞어 놓으면 맥주나 막걸리 안주로도 제법 쓸 만하다.
십 년도 훨씬 전에 대구에 '두레'라는 맥주집이 있었다. 단골들은 주로 문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가들이 주류를 이뤘고 교수와 신문기자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이 여린 여주인은 돈 받는 안주를 강요하지 못했고 단골들은 앉자마자 마른 멸치와 들깨만 시켜 결국 그 집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후 해운대 쪽으로 내려가 '겨울 마차'라는 근사한 이름의 간판을 걸고 다시 영업을 시작했으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는 풍문만 들려왔다. 아마 부산 사람들도 멸치와 들깨만 찾았기에 그렇게 되었겠지. '두레'주점의 폐업에 한몫해온 나는 지금도 미안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들깨 예찬' 생각나게 해
들깨를 재료로 한 음식 중에 들깨 송아리 부각을 빠뜨릴 순 없다. 가을로 접어들어 들깨의 윗대궁에 낟알이 반 쯤 영글 무렵에 송아리를 추수해야 한다. 잎과 알곡이 달려 있는 줄기를 살짝 쪄낸 다음 밀가루나 찹쌀 풀을 끓여 붓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서 말려두었다가 갈무리를 해 둔다. 그걸 튀김기름에 튀겨내면 술안주로는 최상이다. 잎과 낟알 그리고 껍질과 줄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버릴 게 없다. 정말 맛있다. 해걸음에 막걸리 사발 앞에 놓고 들깨 송아리 몇 개 아껴 먹을 때마다 석가탑 그림자가 술잔에 어른거린다. 마음 속으로 행하는 탑돌이, 너무 좋다.
임연규라는 시인이 어느 날 충청도 달래강가를 거닐다가 살아생전에 들깻잎을 좋아하다 돌아가신 어느 영감님의 미망인 노파를 만나 막걸리 몇 잔 얻어 마시고 쓴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시 한 편으로 '들깨 예찬'의 문을 닫는다.
"나 들깨 틀러 가는데 가서 막걸리 한 잔 하시겠소. 막걸리 몇 잔에 할머니와 들깨를 틀며 나는 해야 넘어가지 마라 했다. 젊은이, 살면서 깨소금 같은 날이 몇 날이겠소. 마음 아프지 말고 그저 내 팔자 탓이려니 햐. 영감 죽고 없으니까 내가 잘 한 게 하나도 없어. 영감이 들깨하고 깻잎을 좋아해서 이 밭에 들깨만 심었는데. 지난여름 저 산에 누워 있으니 비가 오니 아나 자식이 왔다 가니 아나. 그 길이 뭔지 한 번 가니까 참으로 무심도 하지."(달래강 20 중에서)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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