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사람들은 신문을 어느 면부터 보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1면의 톱기사부터 읽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거꾸로 본다. 가장 뒷면, 그러니까 전면 광고로 채워진 속지부터 나는 펼친다. 내가 쓰는 이런 글은 1면보다는 뒤편에 자리 잡은 문화면에 실린다. 여러 종류의 예술과 오락, 학술 분야를 다루는 신문의 문화면에서 내가 즐겨보는 건 TV프로그램 편성표다.
8번(KBS), 10번(MBC), 12번(AFKN)만 있던 어릴 적 TV보다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 채널 때문에, TV편성안내는 그만큼 지면을 많이 잡아먹는다. 간혹 여유가 생기는 휴일에는 편성표만 따로 오려내어 곁에 둘 때도 있다. 봐야 할 프로그램을 빨간 펜으로 밑줄 그으며 챙기는 일까진 하지 않는다(몇 번 그랬다).
종이 신문은 잘라서 모으는 재미가 있다. 같은 정기간행물인 잡지와 달리, 신문을 몇 년간 차곡차곡 모을 방법은 적다. 이때 스크랩은 가장 개성적인 대안이 된다. 예전에는 나도 스크랩을 했는데 이젠 흥미를 잃었다. 지금 글을 쓰는 내 서재 오른쪽 네 번째 책꽂이에는 주자의 삶을 조명한 미우라 구니오 교수의 책 서평이 붙어있다. 누레진 이 신문 조각은 15년도 더 되었을 것이다. 한때는 내가 나온 뉴스나 기고한 글을 따로 스크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내 손으로 내 글을 스크랩하는 게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쪼그려 앉아 외과의가 집도하듯 집중해서 자기 글을 자르고 있는 모습은 참 멋없다.
사람 사는 일을 모른다 해도, 내가 신문 톱기사에 실릴 일은 평생 동안 없을 것 같다. 거기엔 대개 굵직한 사건이나 업적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올해 광주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미술 가운데 한스 페터 펠트만의 작품은 매우 인상 깊었다. 전시 공간의 벽 전체를 도배하듯이 신문지를 붙인 작업이었다. 그 신문은 9·11 사건이 터진 다음날 세계 각 나라 일간지 1면이었다. 하나같이 거기에는 화염에 휩싸여 무너지는 빌딩의 사진이 있었다. 작품에는 급박한 사태를 독자에게 알리는 언론의 표면적인 속성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냉소적으로 말하면, 참상이 클수록 사건은 언론에 좋은 기삿거리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 통찰력 있는 작품은 누구도 그런 착상을 하지 않았기에 좋은 예술로 평가받는다. 나도 펠트만에 앞서, 비슷하지만 남들이 볼 때엔 쓸데없는 일을 저질렀다. 몇 년 전 삼성 라이온즈가 우승한 다음날 스포츠 신문을 전부 사 모았다. 타임캡슐처럼 밀봉한 신문들은 훗날 손자손녀를 무릎에 앉혀놓고 할아비가 응원한 야구팀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보여줄 증거다.
윤규홍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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