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시대의 고수들

호모 부커스(Homo Bookers)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독서의 달인'이라는 뜻인데, 지식 습득을 넘어 책읽기로 인생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소통까지 모색하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지난 이십여 년간 나는 잡지사 편집장, 출판 기획자, 도서관 현장 실무자 등 글판에 바탕한 직업을 겹쳐 가진 덕분에 수많은 호모 부커스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떤 측면에선 참으로 행복한 강호유랑이었고, 그들과의 유'무형적 만남과 깊이 있는 대화는 그 풍찬노숙(風餐露宿)마저 정수리에 맞는 마나슬루 봉(峰)의 한 방울 차가운 정수(淨水)로 여겨지게 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한 그들은 모두 나의 스승이었다. 어떤 이는 시황(始皇)의 분서(焚書)를 납득시킬 만한 굉장한 독서 목록을 내게 넘겨주었고, 어떤 이는 리좀식 독서의 묘미를 내게 일깨워주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독서법으로 '깊이 겹쳐 읽은 후 토론하고 글을 쓰라'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고, 평범하게만 보이던 한 아주머니는 치열한 수십 년간의 독서 기록장들을 수줍어하며 펼쳐보이기도 했다.

호모 부커스는 꼭히 타자(他者)의 책읽기에만 또 의존하지 않았다. 자신의 일기장을 키만큼 쌓아놓고 계속 반복해 읽으며 어느 경지에 다다른 듯 보이는 이도 있었다. 광고 이면지를 사돈지(査頓紙)처럼 테두리까지 돌려가며 써내려 간 자신의 일생사를 책으로 내고 싶어하며 출판사로 싸들고 온 어느 할머니의 갈라진 손등은 대하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인생사 지도였으며 한 위대한 소수자의 철학서였다.

그만큼 그들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천진스럽고 맑았다. 우리 회사가 운영한 도서관 구석의 발받침 옆 바닥에 붙박여 책을 읽던 소녀는 토끼굴로 떨어진 엘리스 같았고, 여름 휴가를 열람실 여기저기 흩어져 해질녘까지 책을 읽던 한 가족은 어두운 밤에 켜지는 등불 같았다. 나는 그들을 마음속 깊이 존경했다. 퇴직한 뒤 수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을 드나들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탐독하던 노인과는 한 번도 말을 나눈 적 없었지만 그분 곁을 지나갈 때마다 나는 발끝을 들고 걸었다. 사서들은 그를 브리태니커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은연중 안부를 챙기기도 했다.

호모 부커스들의 세계는 이처럼 내가 좋아하는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책꺼풀처럼 싱싱하고 생생하다. 현재 나는 인문, 철학, 사회과학, 예술 등의 많은 특강을 기획하는데 강좌를 기획할 땐 강호의 고수들처럼 곳곳에 포진해 있는 그들의 구미(口味)를 필히 챙긴다. 특강 주제의 책이나 논문을 검색하고 읽어보는 등 최고의 전문가들을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다.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언제 어디서 그들의 장풍이나 구음신공이 날아들지 모르니까.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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