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한 번에 한 가지씩

햇볕이 봄날 같다. 마음도 포근해져 잔설 희끗희끗한 산등성이로 눈길이 간다. 천천히 드라이브에 나섰다. 뺨에 와 닿는 바람이 싱그럽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정표 따라 오르니 눈 덮인 너덜겅 위 햇살마저 정겹다. 한참을 돌아 고갯마루로 올라서자 첩첩의 산들이 만든 곡선이 절경이다. 파란 하늘 밑 휴게소에 다다랐다. 창가에 앉아 잠시의 여유를 맛보고 있으려니 며칠 전 일이 떠오른다.

퇴근 후에도 자꾸 염려되는 아이 환자가 있었다. 잠깐 들러 얼굴이라도 보고 올 요량에 다시 병원으로 왔다. 차를 금방 뺄 수 있을 곳에 세우고 내리는데 차가 뒤로 조금 움찔하는 듯했다. 나의 움직임 때문이라 생각하고 차 키를 뽑아들었는데 계속 밀려와 그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엉겁결에 내 어깨로 문짝을 버티며 어렵게 사이드브레이크를 먼저 눌렀다. 그래도 차는 점점 빠르게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뒤에 줄지어 서 있는 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경사면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시 보니 기어가 제 위치에 들어 있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주차 위치에 넣고 나니 간신히 멈춰 선다. 식은땀이 확 배어났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해야 할 일들로 머릿속은 복잡하고 시간은 빠듯할 때 내가 마음의 주인이 아닌 듯 느껴질 경우가 더러 있다. 순간순간 깨어 있고자 마음 다잡을 땐 한때 감명 깊게 읽었던 데일 카네기 경전의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 유럽전선에 복무하던 그는 사상자, 실종자에 대한 기록과 사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고, 그들의 유품을 정리해 가족에게 발송하는 일을 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지쳐 있던 그는 혹시 실수하면 어쩌나, 살아서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까, 이제 열여섯 달이 된 아들을 안을 수는 있을지 끊임없이 걱정했다. 체중은 15㎏이나 줄었고 거의 미치기 직전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군의관의 충고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인생을 모래시계라고 생각해 보게. 수천 수만 개의 모래알도 좁은 통로를 지나야만 빠져나올 수 있지. 한 번에 한 알 이상은 통과하지 못해. 인생도 마찬가지라네. 수많은 일이 있지만,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하나씩 해결해 가면 되네. 그렇지 않으면 몸과 정신이 망가질 수밖에 없어."

그날부터 그는 조금씩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하나씩,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여 한 번에 하나씩만 집중하면 마음이 편해져 나도 일을 더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언젠가 시간을 마음대로 만들어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제일 먼저 무엇을 할까 기대해본다.

정명희 대구의료원 소아청소년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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