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3'1독립운동은 어디서 시작했을까. 3'1운동과 기독교는 어떤 연관성이 있나.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2003년 3'1운동길을 제막하고 2010년 3'1독립운동 발원지로 추정되는 위치에 표지석을 세웠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하고 있다. 이와 관련, 대구시에서 오는 3월 1일 3'1운동 재현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대구의 3'1운동은 어떻게 유래했고 재현행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봤다.
◆기독교와 대구의 3'1독립운동
1919년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에 있어 기독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를 선언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 관련 인물이었다. 전재규 대신대 총장은 "3'1운동 정신인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등의 사상은 성경에서 기인한 것"이라며 "3'1운동을 보면 과거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의 상황과 닮았다"고 말했다. 전 총장은 1999년 동산의료원 100년사 편찬위원으로 일하면서 대구의 3'1운동 기록이 잘못된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대구의 3'1운동에 대해 집중 연구를 해왔다.
대구 또한 기독교인들이 선두에 서서 3'1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8일 3'1운동이 시작된 대구에서는 두 곳에서 운동이 촉발됐다. 섬유회관 건너편(구 동산파출소 자리)과 현 의료선교박물관 자리가 그곳이다. 섬유회관 건너편에서는 당시 이만집 대구제일교회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3'1운동을 이끌었고 의료선교박물관이 있는 자리에서는 당시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교사와 학생 등이 집결했다. 전 총장은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이들이 이만집 목사와 정재순 서문교회 목사, 김태련 남산교회 조사,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이었다"고 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구 대구경찰서와 종로, 약전골목, 중앙파출소, 현 대구백화점 등으로 행진했다. 이때 상인들과 시민 등이 합세해 시위대가 1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3'1운동을 계기로 대구에 교회들이 급증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교회가 125개나 늘었다고 한다. 전 총장은 "3'1운동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민족을 사랑한다는 이미지가 굳어졌고 시민들의 교회 참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했다.
◆3'1운동 재현행사
3월 1일 의료선교박물관 자리에서는 대구의 3'1운동을 재현하는 '대구 3'1절 범시민 문화축제'가 열린다. 총 3부로 나눠진 이날 행사에서 1부는 예배, 2부는 묵념과 독립선언문 낭독, 결의문, 3'1절 노래 제창, 만세 삼창 등으로 진행되며 3부는 행진이 이뤄지는 재현행사로 꾸며진다. 재현행사를 주도하고 있는 전 총장은 내년부터는 정례화하는 방안을 대구시와 협의하고 있다. 전 총장은 "대구의 3'1운동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이 같은 행사를 통해 후손들에게 우리 선조의 민족정신과 일제의 만행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재현행사의 하이라이트는 행진이다. 행진은 의료선교박물관이 있는 만세동산에서 시작해 이른바 3'1만세운동길로 불리는 돌계단, 국채보상로 102길을 거쳐 구 동산파출소 자리에 있는 표지석(대구 3'1독립운동 발원지)까지 할 예정이다. 만세동산은 대구제일교회 옆 넓은 터로 현 의료선교박물관인 선교사 챔니스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25호)과 현 선교박물관인 선교사 스윗스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4호)이 자리한 동산이다.
대구기독교총연합회 류지원 사무총장은 "올해는 교회 신도들과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내년부터는 재현복장을 한 학생들을 참여시키는 등 시민들의 관심을 좀 더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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