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직선의 삶, 곡선의 삶

10여 년 전쯤 대구 한 구청 공무원이 이탈리아로 연수를 갔을 때 겪은 일이다. 국외연수를 같이한 공무원 20여 명이 단체로 이탈리아 요리를 하는 식당을 찾아 식사 주문을 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먹음직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온 식당 종업원이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은 한국 손님에게 접시를 불쑥 내밀며 난데없이 큰 소리로 한국말을 했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전달! 전달!"이었다.

놀라며 사연을 알아봤더니 이 식당을 찾은 한국 단체 관광객 거의 모두가 느긋하게 종업원이 시중들어주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접시를 옮기며 "전달! 전달!" 하는 것을 보고 종업원이 그대로 따라했다는 것이다. 종업원으로서는 일일이 서빙을 하지 않아 편하고, 식당에서도 손님들이 빨리빨리 식사를 하고 나가는 게 득이 돼 한국에서 단체 손님이 오면 종업원들이 접시를 주며 전달을 외친다는 얘기였다.

다른 선진국들이 수백 년에 걸쳐 달성한 산업화를 반세기 만에 이뤄낸 대한민국.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비결 중 하나가 '빨리빨리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중동(中東)에 진출한 우리 건설업체들은 외국 건설업체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사 기간을 단축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비단 공기(工期) 단축뿐만 아니었다.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빨리빨리, 속도전(速度戰)이 금과옥조였다. 느리다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었고, 뒤처지는 것은 도태되는 것을 의미했다.

압축적 성장을 이뤄낸 빨리빨리 행태를 달리 보면 직선(直線)으로 표현할 수 있다. 두 점(點) 사이를 잇는 가장 가까운 거리가 직선이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떨쳐버리기 위해, 잘살아보기 위해 우리는 빨리빨리를 모토로 정신없이 달렸다. 목표로 한 지점에 가장 빨리 도달하기 위한 삶,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온 삶, 바로 '직선의 삶'이었다.

남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달려가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소비하는 직선의 삶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많은 이들로부터 질시 섞인 부러움을 받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허무하다"는 하소연을 한다. 사회적 지위에다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인생을 되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쓸쓸한 마음이 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삶의 진리를 2천500여 년 전에 설파한 노자(老子)는 이에 대한 해답도 내놨다. 곡즉전(曲則全)이다. 구부러진 것이 온전한 것이란 직설적인 뜻보다는 곡선(曲線)을 추구하는 삶이 더 풍요롭고, 완전한 삶에 가깝지 않겠느냐는 광의(廣義)의 해석이 가능하다.

'곡선의 삶'은 우선 느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두 점 사이를 곧바로 달려가는 직선에 비해 곡선은 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하지만 늦게 가는 만큼 얻는 것들이 많다. 인생의 속도가 느리니 가족은 물론 인연을 맺은 이들을 차분하게 돌아보면서 여유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걸으면 길에 있는 작은 돌 하나, 길섶에 있는 풀 한 포기까지 볼 수 있지만 차를 타고 질주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곡선의 삶은 다양하다는 게 매력이다. 두 점을 잇는 방법 중 직선은 하나밖에 없지만 곡선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직선의 삶이 규격화된 하나의 삶에 값어치를 두고, 서로 갖고자 투쟁하는 것이라면 곡선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삶의 가치를 인정하고 받는 공존(共存)의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곡선의 삶은 아름답다. 직선의 삶이 차가운 대리석과 같다면 곡선의 삶은 금강송처럼 향기가 있고 온기가 있는 법이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길을 찾아 걷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장(醬)이나 김치처럼 오랜 숙성을 거쳐야 하는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S라인을 주조로 한 건물도 하나 둘 선보이고 있다. 모두가 곡선이 지닌 가치와 매력을 뒤늦게나마 발견한 덕분이라고 본다. 삶의 속도를 늦춰야 할 때가 됐다. 무미건조한 직선 대신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곡선에 빠져들어야 한다. 곡선의 가치를 온전하게 보여주는 저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처럼 곡선의 삶을 살려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부터 말이다.

이대현(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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