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1C 실크로드] ⑩푸른 신기루의 고대도시 투루판

당나귀 달구지 짐칸에 올라 중국 신화의 '인류 시조' 도시로

옛 고창국의 고성을 찾은 여행객들이 당나귀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무너진 궁궐터 옆을 지나가고 있다.
옛 고창국의 고성을 찾은 여행객들이 당나귀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무너진 궁궐터 옆을 지나가고 있다.
현장법사가 국씨 왕의 간청으로 한 달간 머물러 설법했다는 고창 고성의 불상을 앉혔던 감실 사원.
현장법사가 국씨 왕의 간청으로 한 달간 머물러 설법했다는 고창 고성의 불상을 앉혔던 감실 사원.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계곡의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총 57개의 석굴이 뚫려 있다.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 계곡의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총 57개의 석굴이 뚫려 있다.
중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복희여와도 모양의 기념 석상이 아스타나 고분군 중앙에 서 있다.
중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복희여와도 모양의 기념 석상이 아스타나 고분군 중앙에 서 있다.

중원 내륙은 깊이 들어갈수록 황량했다. 버스로 몇 시간을 달려도 산맥은 끝나지 않았고 사막 또한 마찬가지였다. 늑대의 모습을 닮은 낭산산맥 끝에서 곧 고비사막이 펼쳐졌고 천산산맥과 롭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이 그에 질세라 눈앞에 펼쳐졌다. 땅은 상처 입은 야수처럼 자주 우리에게 으르렁댔다. 이 길에 들어선 그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 하리. 모래바람도 윙윙 우리에게 이렇게 외쳐대는 듯 했다. 서역 타림 분지인 투루판은 기원전 흉노와 한, 당대 이후 토번과 위구르, 탕구트, 몽골, 이슬람 사이의 극렬한 전쟁터였으며 문명 교류의 십자로였다. 그 철혈각축을 낯선 이방인들에게 전하려는 것일까. 밤늦게 '교하장원'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호텔로 들어서자 땅은 세찬 바람과 함께 비릿한 흙냄새를 공기에 섞어 풍겨댔다.

투루판의 아침도 어김없이 건조했다. 위구르 노래가 흐르는 목책 입구에서 버스를 내린 우리는 흙무덤 같은 옛 고창국의 고성(古城)으로 당나귀를 타고 달렸다. 늙은 회족 청년(?)이 모는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달구지 한켠엔 왕국의 운명처럼 이민족의 글이 새겨진 낡은 관광책자가 실려 있었고, 여행객들은 덜커덩거리는 흙길의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며 짐칸에 실려 갔다. 왕궁엔 630년 현장법사가 국씨 왕의 간청으로 한 달간 머물러 설법했다는 장방형의 돔 사원과 불상을 앉혔던 우아한 감실(監室)로 넘쳐났지만 당나귀의 목에 걸린 오래된 색끈처럼 세월과 바람에 그 형체가 서서히 쓸려가고 있었다. 멸망한 왕국의 비애가 무너진 궁터와 끊겨진 회랑, 지붕이 없는 흙벽 도처에 쓸쓸하게 흘러넘쳐, 말 그대로 '황성 옛터'의 슬픔을 대변하고 있었다.

고창국은 439년 북량의 패잔병인 감 씨가 세우고 누란, 한족의 침입으로 부침하다가 결국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귀국할 즈음인 640년 법사의 모국인 당에게 복속되고 만다. 그리고 13세기 이후 몽골군이 고도를 폐허로 만들어버렸고, 19세기 이후부터 독립을 꾀하는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한족(漢族)과 위구르인들 간의 유혈분쟁 탓인지, 조선족 가이드는 분노한 한족의 시각으로 위구르인들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계속 인지시키기에 바빴다.

하지만 길에서 마주치는 위구르인들은 온화했다. 나무에 기대어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선량한 눈빛의 위구르 노인과 슬리퍼를 신어 드러난 그의 모래바람에 쏠린 발뒤꿈치는 '폭력의 구조'라는 화두를 새삼 내게 던져 줄 따름이었다. 그래서인지 한족 중국인들의 분노는 다음 목적지인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도착했을 때 오히려 공감할 수 있었다. 지난 여행지인 병령굴, 막고굴을 안내하는 가이드나 한족 학예연구사들이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서방과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을 양귀자(洋鬼者) 또는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 섬뜩하게 일컬었는데, 그것은 우리도 절감하는 지난 세기 초 그들의 무참하고 철저하게 문화재 수탈에 기인한 것이었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란 뜻을 가진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손오공의 활약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화염산 기슭에 몽환(夢幻)처럼 숨어 있었다. 막고굴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석굴을 파 불상을 안치하고 벽화를 그려 안녕을 기원하거나 수도하던 사원이다. 1898년 러시아의 클레멘츠가 처음 학계에 알린 이후 유럽의 탐험가들이 제 집 들락거리듯이 몰려와 석굴 안에 있는 벽화들을 뜯어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입구 광장에서 절벽을 끼고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총 57개의 석굴 중 개방된 몇 곳에는 거의 그들에게 도둑맞아 훼손되거나 회교도들에 의해 파괴된 석불과 벽화들만 남아 있었다. 통째로 잘라낸 벽화의 흔적이나 검게 칼로 파낸 부처와 보살의 눈 그리고 목과 팔이 잘려나간 불상의 모습에서 패배자들의 얼굴 거죽을 벗겨내었다는 고대 야만족들의 만행을 목격하는 듯 했다. 누군가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오히려 제국주의자들의 그 행위가 유물을 보존하는데 일조를 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자 의견이 분분해졌다. 그러나 곧 떼어 내간 벽화의 자리에 사진을 찍어 전시하기 위해 중국이 유럽의 박물관에 촬영료로 고액을 지불해야 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모두 할말을 잃었다. 일제(日帝)가 조선총독부에서 미처 챙겨가지 못한 1천7백여 점의 실크로드 유물들이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데 소위 오타니(大谷) 컬렉션이다. 그 중 이 석굴에서 떼어 내간 아름다운 벽화 4점이 있다고 한다. 몇 사람은 이러한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였다.

아스타나 고분군은 고창국과 당나라 때의 456기의 묘지가 발굴된 곳이다. 귀족들의 공동묘지 격인 이곳에서 총 1만근이 넘는 목독(木牘)과 문서,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伏羲女渦圖)가 출토되었다. 지하계단을 만들어 개방한 고분에는 밀랍 미라가 전시되어 있는데, 나는 말도 안 되게 자꾸만 베제클리크 석굴 회랑에서 위구르 거리연주자의 북소리에 맞추어 신명나게 춤을 추던 아름다운 백러시아계 여성이 거기 겹쳐 보였다. 여독(旅毒) 탓인가. 투루판의 해는 아직도 중천에 떠 있는데.

글:박미영 (시인, 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사진: 박순국 (전 매일신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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