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위기에서 건질 가치

일본에서 생태를 수입하는 부산의 한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도호쿠 지진해일이 덮치기 이틀 전 센다이의 거래처 사장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지진 예보가 있어 마침 쓰나미 대피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던 차라고 했다. 지진이라는 말에 찜찜해 평소보다 더 많은 200박스의 주문을 넣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틀 뒤인 3월 11일 도호쿠 대재앙 뉴스를 듣고 걱정이 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며칠 뒤에 겨우 통화가 됐지만 창고가 완전히 파괴돼 주문을 맞출 방법이 없다며 미안해하더라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인지 방사능 오염 때문에 요즘 일본산 생태를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 엄청난 쓰나미가 바로 내 눈앞에서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럴 가능성은 있지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쓰나미가 자연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에도 쓰나미가 존재하고 기업, 사회, 국가에도 쓰나미와 같은 위기 상황이 벌어진다. 지금처럼 치열한 경쟁 시대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쓰나미 위에서 위태롭게 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제너럴 모터스(GM)는 좋은 예다. GM은 1908년 마차 제조업을 하던 윌리엄 듀랜트가 세운 기업이다. 창업 20년 만에 포드를 밀어내고 업계 1위를 차지한 GM은 자동차 왕국이었다. 1950, 60년대 세계 1위 메이커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미국인들은 덩치 크고 화려한 GM 차에 열광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자 상황은 일변했다. 석유 파동에도 GM은 큰 차체에 고배기량의 엔진을 고집했다. 기술을 과신한 나머지 엔지니어링(설계)은 제멋대로였고 부품은 후져 툭하면 고장 났다. 시장이 변하고 소비자 요구가 달라졌는데도 개선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GM은 서서히 침몰했다.

북미 자동차 소비자 가이드북 '레몬-에이드'(Lemon-Aid) 2009년 판에 이런 리포트가 실렸다. 요약하면 값싼 흡기 매니홀드 가스켓이 GM을 말아먹었다는 내용이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생산된 GM의 3ℓ, 4.3ℓ V6엔진에서 오일과 냉각수가 새는 고질적인 결함이 터졌다. 문제가 된 차량만도 무려 40여만 대에 달했다. 수백만 원의 수리 비용이 나오자 소비자들이 들끓었다. 쏟아지는 비판에도 리콜 없이 뭉개고 있던 GM을 상대로 총 12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이 벌어졌다. 결국 GM은 패소했고 1인당 800달러를 보상하는 일이 벌어졌다. 잘못 설계된 엔진 하나 때문에 금전적 손실은 물론 오명을 뒤집어쓴 GM은 결국 금융위기 때 구제금융에 손 벌리는 처지가 됐고 도요타에 1위 자리를 내주고야 말았다.

아무리 차는 뽑기 나름이라지만 열에 대여섯 대가 여기저기 새고 꺼지고 덜컥거리면 소비자는 성질 날 수밖에 없다. 2류로 취급받던 도요타'혼다가 북미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게 된 것은 기술력을 키우고 품질 개선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측면도 있지만 GM과 포드, 크라이슬러 등 빅3가 위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 혁신에 실패한 결과다. 흥망성쇠의 순환 고리에서 어떤 기업도 사회, 국가도 자유로울 수 없다. 잘나가다 곤두박질치고 아예 간판 내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리콜 사태로 홍역을 치른 도요타 사태만 해도 그렇다. '도요타 죽이기'라는 해석도 있지만 세계 1위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원가 절감에 매달린 나머지 '품질'이라는 절대 가치를 소홀히 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위기는 개인과 기업, 국가를 차별하지 않는다. 위기는 벌어진 틈을 헤집고 들어와 또 다른 위기를 부른다. 일본 대지진과 지진해일로 2만 명이 넘게 죽거나 실종됐다. 피해액 집계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후쿠시마 원전까지 폭발했다. 정교한 위기 대응 시스템으로 소문난 일본이 우왕좌왕하면서 지구촌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일본 언론도 '매뉴얼 사회의 한계'라며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그래도 위기에 대비하는 자세는 우리보다 한 수 위다. 자연재해뿐 아니라 모든 위기 앞에 우리는 얼마나 철저히 대비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위기가 덮치기 전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徐琮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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