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일본은 스스로를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공업사회라 했다. 물질적 풍요, 정치사회적 안정, 완전고용과 90% 이상의 중산층이 이를 상징했다. 그 후 일본은 20년 이상 침체일로를 걷고 있다. 급기야 세계적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영국 런던 정경대학) 교수는 1991년 '왜 일본은 몰락하는가'라는 책에서 2050년에 일본은 반드시 몰락한다고 단언하며, 동북아공동체에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 금융, 교육의 황폐, 특히 정치적 무능과 부패를 일본 몰락의 주범으로 꼽았다. 그 연장선상은 아니지만, 이번에 대지진의 피해를 맞았다. 파괴된 건물의 잔해, 두려움으로 피난처에 웅크리고 있는 이재민들, 원자력발전소에서 사투를 벌이는 결사대의 비장함이 추락한 공업사회의 모습과 중첩되어 떠오른다. 지금 세계가 일본을 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정치는 리더십을 상실하고, 일본적 시스템은 한계를 드러냈다.
지난주 금요일 아내가 밤늦게 돌아왔다. 금요 기도회를 다녀왔단다. 왈, "지진 피해를 당한 일본을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나도 공감이 갔으나, 조금은 생경하다. 한국 사람이 언제 일본을 위해 기도한 적이 있었던가. 이웃 나라의 동정심인지 인류애인지 알 수 없으나, 여하튼 한국은 지금 일본 돕기 열풍에 휩싸여 있다. 한류 스타를 비롯해 정신대 할머니까지 발 벗고 나서고, 크리스마스에나 봄직한 구세군 냄비도 등장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8일, 이번 재앙이 아시아 국가들의 뿌리 깊은 반일 감정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아시아 국가들은 지진해일의 폐허 속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고 동정심과 함께 경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과거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성공한 공업국가의 오만함이 불러일으킨 분노와 시기에 대한 카타르시스일까.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아픔을 겪고 있다.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상처를 준 일본이 겪고 있는 고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일의대수(一衣帶水), 일선동조(日鮮同祖), 대동합방(大東合邦), 내선일체(內鮮一體) 등으로 상징되어 왔다. 지리적, 인종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것을 전제로, 한국(조선)을 병탄하기 위해 일본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한국 쪽에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는, 2차 대전 이후 사용하기 시작한 '가깝고도 먼 나라' 정도이다. 2010년 6월 KBS와 NHK가 공동으로 두 나라 국민의 의식조사를 했다. 일본이 좋다는 한국인은 28% 정도이고, 한국이 좋다는 일본인은 약 두 배가 넘는 62% 정도였다. 한일관계의 기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뿌리 깊은 집단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일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거대한 자연의 재앙 앞에서 겸손해진 인간들은 서로를 용서하고 뭉친다. 숙적이라 여기는 일본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이다. 우리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던 그들에 대한 비난의 무덤이 일시적으로 없어진 것이다. 이번 기회를,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이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우리는 자원도 없고 땅도 좁아 자력갱생이 불가능한 나라이다. 한때는 국제원조를 받아서, 지금은 외국 시장에 휴대폰을 팔아서 생존하는 한국이다. IMF 외환위기로 국민소득이 반 토막 나고 식민지의 상처를 극복해온 국가답게, 이웃나라가 겪는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이 이번 기회에 커질 수 있다면, 우리에겐 엄청난 소득일 것이다. 한일 간의 역사는 기억하지만, 더는 일본을 미워하고 비난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위로를 받으려 하지 말자.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자. 진실한 우리의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의 속박에서 풀려나게 될 것이다.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2007년)라는 책에서 관용을 상실한 국가는 쇠퇴한다고 했다. 한국을 위해서라도 그들이 일어서도록 기도하자. 역사의 상처와 지금의 혼돈마저 동북아시아의 미래 자산으로 만들 만큼 한국은 충분히 강하고 아름답다.
(계명대학교 교수·일본학과)
※오늘 본란에 실릴 예정이던 '요코야마 유카의 한'일이야기'는 필자가 센다이에 있는 도호쿠(東北)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어서 이번 동일본 지진사태로 인해 잠시 동안 중단하게 됐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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