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혹시 자녀를 '공부 기계'로 만들지 않습니까

학업 스트레스, 중·고생도 위험 수위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이후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험 불안증부터 등교 거부, 섭식 장애 외에도 우울증 증세로 병원을 찾는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카이스트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 이후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가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험 불안증부터 등교 거부, 섭식 장애 외에도 우울증 증세로 병원을 찾는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중간고사를 앞둔 대구 수성구 한 고교 1년생 A군은 요즘 내신 성적 부담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 이내의 성적을 유지했지만 고교 입학 후에도 그 같은 순위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밤잠을 설치다 보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전쟁이다.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다.

"혹시 시험을 망쳐 부모님을 실망시킬까 겁나요. 시험을 망치는 꿈도 종종 꾸고요. 엄마는 성적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챙겨주니 못할 이유가 없다고만 하시는데 저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잖아요."

최근 '최고급 두뇌'로 꼽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재학생들이 학업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잇따라 목숨을 끊어 충격을 주고 있는 가운데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가 교육 현장의 이슈가 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학업 부진아나 학교 부적응 학생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학업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경쟁 일변도 분위기, 쌓여가는 학업 스트레스

"도저히 못 견디겠어요. 시험도, 학교도 싫고 그냥 좀 쉬고 싶어요."

대구의 고3인 B군이 다니는 학교는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많이 몰려 있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 가운데서도 B군은 돋보이는 성적을 유지했으나 지난해 2학기부터 공부에 통 집중하지 못하면서 등수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안 가려고 부모와 실랑이를 벌인 것도 수차례. 결국 지난달 어머니 손에 이끌려 병원 정신과를 찾았고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부모님은 제가 공부하는 기계인줄 아시나봐요. 성적이 떨어지면 과연 부모님이 제게 관심이나 가져줄까요? 등수 걱정 때문에 시험을 칠 때마다 불안해 미치겠어요." B군은 학교에선 여전히 모범적인 학생이지만, 현재도 병원에서 정기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

고교 1학년인 C군은 중학생 때부터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전교에서도 10위 이내에 들었던 수재다. 부모의 학력도 높고 가정 형편도 남부럽지 않을 정도. 하지만 3월 개학 후 한 달 넘게 등교를 거부하며 부모와 마찰을 빚고 있다. 아직 치르지도 않은 시험에 대한 불안감 때문. 부모는 아들을 윽박지르기도 하고 타일러 보기도 했지만 C군의 고집을 쉽게 꺾지 못했다. 심지어 C군은 여러 차례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말로 부모를 당황하게 했다. 손목에는 흉기로 그은 자국까지 선명히 남아 있다.

"엄마는 툭 하면 '너희 아빠는 과외 한 번 안 받고도 성공했다. 이 환경에서 네가 공부 못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다그치세요. 그런데 저도 사람이잖아요. 어떻게 늘 잘 할 수 있겠어요. 시험을 쳐서 등수가 떨어지면 어쩌나하고 불안하기만 해요."

고교 1학년인 D양은 지난 겨울방학 동안 몸무게가 10㎏ 이상 줄었다. 다이어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체중이 준 것은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 식욕이 없을 뿐 아니라 억지로 먹어도 게워내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부터는 부모에게 휴학을 하고 싶다며 보채는 중이다.

"이젠 더 이상 시험 문제 하나 틀릴 때마다 벌벌 떨기 싫어요. 차라리 학원에만 다닐래요. 어떻하든 대학만 좋은데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학업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학생들의 부모 또한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한 번 성적이 떨어지면 회복하기 힘들다', '저러다 혹시 엇나가지나 않을까' 등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다.

주부 이모(48) 씨는 고 1년생 아들 때문에 고민이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말 잘 듣고 똑똑한 아이였는데 요즘은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벗어놓은 교복에선 담배 냄새도 묻어나는 것 같다. "남들은 '아들 공부 잘 하니 좋겠다'고 하지만 속을 모르고 하는 소리에요. 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말만 하라는데도 짜증만 낼 뿐이죠. 서울 명문대에 간 형 얘기만 꺼내면 고함을 지르고요."

고3 수험생의 어머니 김모(49) 씨도 딸이 걱정스럽다. 반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아이인데 감정 기복이 심해지더니 지난해 2학기에는 성적이 10위권으로 내려앉았다. "요샌 한 번 화를 내면 물건을 벽에다 집어던지는 등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열심히 하라는 말도 못 하겠어요. 뉴스에서 카이스트 학생들 얘기가 나오니 더럭 겁이 나더군요. 올해만 잘 넘기면 되는데…."

◆급하게 가려는 욕심을 버려야

학업 스트레스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채 성적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다보면 등교 거부 등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청소년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에 학부모, 교사, 친구 등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큰 힘이 된다. 전문가들은 특히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자존심 때문에 좀처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해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낸 통계자료에서도 청소년들이 얼마나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지 엿볼 수 있다. 연구원이 2월 발표한 '4개국 청소년 건강실태 국제 비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한 한국 고교생 비율은 72.6%로 중국(59.2%), 미국(54.2%), 일본 (44.7%)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1월 한국과 중국, 일본 청소년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한국 청소년의 학업 실태' 보고서에서는 부모로부터 받는 학업 스트레스가 상당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상위 10등 안에 들 것을 요구하는 부모 비율은 한국(24.7%)이 가장 높았고 중국(24.3%)과 일본(10.8%)이 뒤를 이었다. 등수를 말하지 않지만 더 좋은 성적을 요구한 부모의 비율도 한국(48.6%), 중국(45.9%), 일본(31.3%) 순이었다.

대구시교육청은 학생들의 학업 스트레스를 줄여주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나가고 있다. 시교육청은 2009년부터 '공감형 상담실'을 초'중'고 156개교에 설치하고 상담인턴교사 135명을 배치해 학생들의 고민을 듣고 있는 것. 또 교육지원청별로 Wee센터를 운영하면서 증상이 심한 학생은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학교 차원에서도 학생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려는 방안을 시도하고 있다. 경신고의 경우 점심 시간을 이용해 리그 형식으로 3학년들만 참여하는 반별 축구 대항전을 열어 학생들의 호응을 얻고 있으며, 대구여고는 교내에 산책로를 만들고 급식 시간에 생일 이벤트를 열어주며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시교육청 창의인성교육과 생활문화 담당 김영탁 장학관은 "우선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다가올 수 있도록 상담실에 사탕과 과자를 비치하고 음악을 들려주는 등 편히 드나들 수 있도록 꾸몄다"고 말했다.

정신과 전문의들은 부모의 변화 노력이 뒷받침돼야 자녀의 마음도 안정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경북대 소아청소년정신과 정운선 교수는 "특히 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은 불안감 등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려도 겉으로는 어느 정도 성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황이 심각해진 뒤에야 부모가 자녀와 함께 병원을 찾는 경향이 있다"며 "아이 치료와는 별도로 어머니는 불안감에 아이를 채근하고 아버지는 성적을 두고 어머니를 탓하는 행동을 자제하도록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 마음과마음정신과의원 김성미 원장은 "학업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학생들이 하루 10명 넘게 병원을 찾아온다"며 "고교 1년생이 가장 많지만 자살 충동 등의 극단적인 사례는 고 3학생들에게 주로 발견된다. 이럴 때는 부모들이 자녀의 성적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둬 스트레스를 감소시켜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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