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걸어다니는 지도

이 지도에는 비 오는 날이 빠져 있다 두통이 심한 날도 빠져 있고 무엇보다 새벽이 빠져 있다 내가 걸어다니는 이 지도에는 어제까지 안개가 끼어 있었다 꽃이 피어 있었다 꽃이 피었다가 사라진 바로 그 지점에 어제까지 한 사람이 누워 있었다 누워 있는 그로부터 이 지도는 유래한다 그의 이름은 이 지도 어딘가에 숨어 있고 안개가 끝나는 지점에서 또 한 사람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 핏줄이 자라서 사람이 될 때까지 나머지는 걸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지도에는 지금 사람이 빠져 있다

김언

 

지도는 지구를 축약해서 물리적인 구조만 기록한 거죠. 지상에 있는 산과 산맥, 강과 바다, 도시와 도로를 표시한 거죠. 근데 맞아요. 왜 비오는 날이나 두통이 심한 날은 빠져있는 거죠? 왜 사랑하는 이가 떠났는지도 나와 있지 않고 어제 읽은 IQ84의 주인공은 그 이후 어떻게 되었죠?

상식을 거스르며 시작하는 이 시가 참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나요? 시 아닌 것에서 시를 구하는 것이 이 시인의 관점인데, 말하자면 자명한 세계 앞에서 길을 잃게 하는 것이 시라고 말하지요. 그래서 이 시처럼 시인들은 길을 잃고 각각의 개성으로 낯선 자기만의 지도를 그리게 되리라는 전망. 그게 바로 시라는 주의.

"꽃이 피었다 사라진 바로 그 지점에 어제까지" 누워있던 한 사람은 지상에 존재하거나 부재하는 인간들의 희로애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요? 인간의 지도란 그리하여 사람과 사람의 삶을 이은 핏줄이라 보겠어요. 가끔 스스로 부재하고 싶은 욕망까지도 포함하여 말입니다. 그걸 생각하며 오랜만에 벚꽃 그늘 아래 걸어가는 나를 이 지도에서 한번 찾아보실래요?

(시인)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