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규리의 시와 함께] 기우(이영광)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제주도 보리밭에 깜짝 놀란

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

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

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

산지기 같은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노려봤지요

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內室)에

날 불러들여 세워 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걸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 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가는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

세상에서 정말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제일 미더운 사람은 누구일까? 그거 간단하다. 밖에서 부득이 실례를 할 수밖에 없을 때, 부득불 누군가를 세워둬야 할 때, 그때 선택되는 사람이다.

특히 여자가 그 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고 봐도 된다. 그걸 동행이라고 하나. 그럴 만한 사람을 은인이라고 하나. 이 시의 화자는 그 미묘한 심리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산지기 얼굴을 하고서라도, 비자림으로 냄새를 감싸면서라도 당신을 보호하리라는 언약.

더하여 그 중요한 일을 스스럼없이 맡겨 주었으므로 나는 당신에게 깊어진 사람이라는 자족. 그 일은 나 혼자만 당신 속에 들어가 본 것처럼, 나 혼자는 나올 수도 없는 곳처럼 비밀스러우리란 수긍. 훗날 당신이 뭐라시면 난 그 일을 떠올리며 웃다가 울리라는 서약. 혼자 쓰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 기우.시인

최신 기사

0700
AI 뉴스브리핑
정치 경제 사회 국제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의 대구시장 공천 과정에서 현역 중진 의원 컷오프와 공천 잡음이 이어지며 당내 반발이 커지고 있다. 리얼미터...
정부가 석유제품 가격 안정을 위해 최고가격제를 시행했음에도 일부 주유소에서 가격 인상이 발생한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는 주유소 가격 변동을 ...
한 네티즌이 현관문 앞에 택배 상자가 20개 쌓여 문을 열기 어려운 상황을 공유하며 택배 기사와 소비자 간 배려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안전 확보를 위해 중국의 협조를 압박하며 예정된 미중 정상회담의 연기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