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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기행] <19>의성 영남소로

교통요충지 도리원…의성마늘소 브랜드 먹을거리 타운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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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일과 3일 안계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둔치에서 매일신문과 의성군 공동주최로
지난달 2일과 3일 안계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둔치에서 매일신문과 의성군 공동주최로 '2011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대회'가 개최돼 안계가 연의 도시로 새롭게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 영남좌로는 한양(지금의 서울)에서 봉화삼로로 통하는 양주, 광주, 여주, 충주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서 경상좌도의 도시들인 풍기, 영주, 안동, 의성, 의흥, 신령, 영천, 경주, 울산, 기장, 동래로 연결되는 길을 말한다. 당시 의성읍을 비롯한 금성'춘산'가음'사곡'옥산'점곡 등 의성 동부지역, 의흥'우보'고로'산성 등 군위 동남부지역, 신녕 등 영천지역 주민들은 영남좌로를 통해 한양을 가기보다는 주로 영남소로격인 지금의 의성군 봉양면 화전2리 속칭 도리원에서 비안'안계를 거쳐 단밀면 낙정리 낙정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 상주, 문경, 충주를 거쳐 한양으로 통하는 영남대로를 택했다.

◆금성의 조문국과 봉양의 큰 마을 도리원

한양에서 영남좌로를 통해 부산 동래에 내려가려면 지금의 의성군 금성면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금성면 일대는 고대국가와 삼국시대의 문화유적들이 즐비한 곳이다. 특히 금성면 대리리 일대는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의 근거지였다. 현재 28번 국도변의 조문국 유적지는 당시 조문국의 경덕왕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무덤이었다. 실제로 1960년 의성 금성산 고분군에서는 금동관과 금동 신발 등이 출토돼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조문국 유적지에는 현재 의성군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조문국 유물들을 한곳에 모아 보관하기 위해 조문국박물관을 건립하고 있다. 또 조문국 유적지에 있는 경덕왕릉에는 지금도 매년 4월이 되면 의성군수가 초헌관이 돼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이 밖에 금성면에는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국보 77호인 탑리5층석탑과 금성산(531m)이 있다. 높이 9.6m, 폭 4.5m의 화강석으로 만든 탑리5층석탑은 전형적인 석탑을 따르면서 일부는 전탑의 양식을 본뜬 것이다. 금성산은 조문국 때 성을 쌓은 곳으로 아직도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금성에서 영남좌로가 아닌 지금의 지방도 927호선을 타고 북서쪽으로 가면 봉양면 구미리에서 5번 국도를 만나고, 이곳에서 4㎞를 가면 봉양면 화전2리 속칭 도리원이 나온다.

도리원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주민들이 큰마을이라고 부른 '원'이었다. 당시 의성에는 도리원과 의성읍의 북원 등 11개의 원이 있었다. 당시의 원은 관리들이 출장 때 묵어가는 곳이었지만, 공사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 도리원이다. 도리원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원이었던 관계로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 도리원에는 전기와 수도가 설치됐고, 신작로에 아스팔트가 깔리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이전부터 교통이 발전하면서 도리원은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도리원에서 안계, 예천으로 가는 길과 의성과 안동, 안평과 신평, 금성으로 가는 길 등 모든 길이 도리원으로 통했다. 이 때문에 도리원에는 예부터 식당들이 즐비했고 특히 돼지고기 요리가 유명했으나, 지금은 의성의 한우브랜드인 '의성마늘소' 먹을거리 타운으로 발전했다. 이와 함께 봉숭아 도(桃)와 오얏나무 리(李)의 도리원 지명 때문인지 봉양자두가 전국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며, 자두철인 6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는 '도리원의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이 밖에 도리원과 관련해서는 조선 성종 때 좌찬성을 지낸 강희맹이 도리원에 묵어가면서 남긴 '골짜기가 멀어서 맑은 물 흐르고/ 모래가 평평해서 짧은 뗏목 없구나/ 나루를 물었으나 길을 잊어버렸고/ 연기나는 곳은 두어 집뿐이다'라는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비안의 항일운동과 안계평야에서의 국제연날리기대회

도리원에서 며칠 묵고 길을 재촉해 단밀면 낙정나루터에 도착하려면 영남소로격인 비안과 안계를 거쳐야 한다. 비안은 1914년 3월 1일 이전에는 현이었으나, 조선총독부령으로 지방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의성군에 통합됐다. 비안은 일제강점기 기미년 3월 12일 의성에서 가장 먼저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숱한 애국인사들이 투옥되면서도 항일운동을 펼친 곳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비안면 소재지인 이두리와 서부리로 향하는 군도 15호선에는 수많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어 기미년 당시 독립만세운동을 보는 듯하다.

안계는 넓은 들을 가지고 있다. 안계는 단북과 단밀면, 구천면 등의 넓은 들판이 '안계평야'를 이루고 있다. 안계평야는 경주 안강평야, 영천 금호평야와 함께 경북의 3대 평야로 불리기도 한다. 안계평야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위천이 한중간을 가로질러 의성의 젖줄을 이루고 있고, 위천 제방 길이만도 9.9㎞에 달한다. 옛기록과 흔적을 보면 안계평야가 얼마나 광활한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삼국 이전인 삼한시대의 대표 못은 상주의 공검지, 제천의 의림지,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등이 있었으며, 의성에도 비슷한 규모의 대제지가 있었다. 대제지는 지금은 사라졌다. 안계평야의 들머리에 위치한 안계면 용기2리 마을 앞에는 '대제지유허비'가 있다. 대제지의 존재를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다. 기록에서 대제지의 규모는 '공검지, 의림지'급으로, 30㏊(일부 문헌에선 60㏊) 규모에다 제방 길이도 1㎞가 넘었다. 8'15 광복 직전까지 존재하다가 지금은 농토로 변했다. 우리의 역사가 시작할 무렵부터 의성은 곡창지대였던 것이다. 지금 안계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의로운쌀' 브랜드로 대구경북과 수도권에까지 팔려나가고 있다. 안계는 5일장의 규모도 크다. 1일과 6일 열리는 안계장은 면소재지 장 가운데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1939년 2월 한 일간지에 실린 어느 날 안계장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돼 있다.

'이웃 7개 읍면에서 모여든 장꾼들이 2만 명을 훌쩍 넘겼다.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 내기와 묵 내기 화투판을 벌이고 있다. 여기저기 낮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는 이들, 흥정과 시비, 흥청거림과 떠들썩함, 순박한 농부와 세련된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내내 장터에 가득했다.'

안계는 1983년 도리원에서부터 28번 국도가 포장되면서 의성 서부지역의 교통과 상권의 중심이 되면서 발전을 거듭해왔다. 특히 지난달 2일과 3일에는 한국을 포함, 세계 22개국이 참가한 '2011 의성 산수유 꽃바람 국제연날리기대회'가 매일신문과 의성군 공동주최로 33만㎡의 위천둔치에서 열렸다. 이번 국제연날리기대회에 참가한 중국 웨이팡의 국제연협회 관계자는 "한국 의성 안계에 국제연날리기대회를 개최할 만큼 넓은 장소가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랄 뿐이다. 의성 안계는 전 세계에 연의 도시로 각인될 것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계는 이제 '쌀의 고장'이면서 '연의 도시'임을 전세계 만방에 알리게 된 것이다.

◆단밀 낙정나루터와 낙단보

안계에서 서쪽으로 지방도 912호선을 따라가면 단밀면 소재지인 속암리와 생송리, 낙정리가 연이어 나타난다. 낙정리는 그 유명한 낙정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낙정나루터는 조선시대 구미와 선산, 의성지역 주민들이 영남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었으며, 그 강이 바로 낙동강이다. 의성에서는 낙정나루로, 상주에서는 낙동나루를 통해 낙동강을 건넜던 것이다. 이 나루터는 낙동강 물류의 종착지다. 옛날 나루의 주막과 숙소는 지금의 단밀 땅에 즐비했다. 지금은 주막 등이 들어섰던 터만 남아 있다. 하지만 불과 1986년 의성 단밀면 낙정리와 상주 낙동면 낙동리를 잇는 낙단교가 개통되기 전만 해도 이 나루는 제법 나루다웠다고 한다. 1980년대 초 낙단교가 완공되기 전에는 주막과 밥집이 꽤 있었고, 큰 거룻배가 버스와 경운기, 자전거, 봇짐장수를 실어 날랐다. 그러나 다리가 생기면서 옛날 나루 풍경이 기억 속으로 사라진 것. 지금 나루가 있었으면 제법 사람 냄새가 풍기고, 낭만에 젖을 만도 한데 말이다. 낙단교 바로 옆 언덕 위에는 잘 생긴 누각이 있다. 바로 낙동강변 3대 누각인 관수루다. 이황, 주세붕 등 조선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짓고, 낙동강 정취에 젖어 노래를 부른 곳이다. 또 나루를 찾는 손님들에겐 먼 한양 땅으로 가기 위한 임시 쉼터요, 숙소였다. 관수루는 나루가 남긴 유일한 유산인 셈이다. 낙정리 일대는 낙동강 경제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저 멀리 남해 바다에서 올라온 소금, 수산물 등이 '총집결한' 곳이기도 하다. 이를 말하듯 낙정리 인근에는 소금을 저장 관리하는 염창도 있었다. 낙정리는 옛날에는 상주 땅이었지만 지금은 의성 땅이다. 낙정나루터가 없어진 지금 낙정리에는 나루터 대신 낙단보가 건설되고 있다.

정부가 4대강 살리기를 위해 낙동강과 영산강, 금강, 한강 등지에 보를 설치하는데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 옛날 나루터가 있던 곳에서 상류 쪽으로 200m 위에 낙단보가 설치되고 있는 것. 올 연말 완공을 목표로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낙단보에는 지난해 10월 마애불좌상이 발견돼 불교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주민들이 제2의 마애불좌상이 있다고 주장해 문화재청 등이 3일부터 발굴에 들어갔다.

의성·이희대기자 hd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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