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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최의 세상 내시경] 과거와 싸워 이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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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했을 때 행운으로부터 떠나라." 스페인의 철학자 그라시안의 말이다. 유럽 지혜의 대가라고 불리는 이 철학자는 "명성 있는 도박사들은 다 그렇게 한다"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혹자는 선거를 두고 '과학'이라고 하고, 또 다른 혹자는 '도박'이라고도 한다. 치밀한 예측과 전략이 1, 2%의 차이로 승부를 가른다는 점에서는 선거가 과학이란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 한편으론 가진 것을 몽땅 다 걸고 모험을 한다는 점에서 선거와 도박 역시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4월 27일 재보궐 선거가 치러졌다. 국회의원과 도지사를 합쳐 단 4곳밖에 안 되는 미니 선거였지만 가히 그 열기는 폭발적이라 전국 선거 못지않게 판이 커졌다. 최종 승부는 결국 야권의 압승으로 돌아갔다. 진 쪽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지도부가 총사퇴하는 등 침통을 넘어 진통의 단계를 겪고 있다.

이긴 쪽은 잔치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치 인생을 거는 모험을 했던 당 대표는 지지율이 껑충 뛰어올라 대선주자 2위로 의기양양하게 자리매김했다. 한 발 더 나아가 정권교체를 현실 가능한 목표치로 설정하는 등 한층 고무된 분위기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승리의 도취는 짧을수록 좋다.

승자인 민주당은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자신들이 잘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이 싸워 이긴 상대는 한나라당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민주당이 맞붙어 누른 상대는 다름 아닌 정권 말기 힘을 잃어가는 정부, 여당이었다. 유권자가 민주당의 미래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정부 여당의 실책을 꾸짖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승자는 미래와 싸워 이긴 것이 아니라 과거와 싸워 이긴 것이다. 반쪽짜리 승리인 셈이다. 이런 불길한 예감은 이미 곳곳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재보선이 끝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민주당은 한-EU FTA 비준동의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관성 없는 오락가락 행보로 야권연대 파기의 위기를 초래했고,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비판을 가함으로써 애써 얻은 민심을 허탈하게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샴페인을 터트린 지 불과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한계를 드러낸셈이다.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행복은 느긋이 즐겨도 무방하다. 그러나 거저 주어지는 행운, 특히 오래 지속되는 행운은 일단 의심해 봐야 한다.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의 탑은 허술할 수밖에 없다. 금세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가 결국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버리는 것이 명약관화하다.

진검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권교체냐, 정권재창출이냐 운명의 한판승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 달려 있다. 그날을 위해 축포는 뒤로하고, 지금은 서둘러 승리로부터 떠나는 처세가 필요하다.

'멋진 후퇴는 대담한 공격만큼 가치가 있다'고 하질 않았나. 지혜의 대가가 하는 충고를 곰곰이 음미해 보길 바란다. 지금 민주당에게 필요한 것은 물러설 줄 아는 지혜이다.

최 중 근(탑정형외과연합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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