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오이일까?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오이대왕'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짙은 초록색에 길쭉하고 골이 진데다 표면이 우둘투둘한 오이. 냉국이나 소박이, 무침 반찬으로 밥상에 자주 오르는 친근한 채소. 어디를 봐도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오이를 괴상한 나라의 대왕으로 만들다니 참 대단한 작가의 상상력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공은 열네 살의 중학교 1학년 볼프강이다. 볼프강의 가족은 뇌졸중을 앓고 있는 일흔 살 할아버지, 자동차 보험회사 과장인 마흔 살 아버지, 역시 마흔 살인 엄마, 고등학교 1학년인 마르티나, 막내둥이 닉까지 여섯 명이다. 겉으로 별 문제없어 보이는 평범한 가족인 볼프강의 집에 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부활절 연휴의 일요일 아침이었다. 자신을 트리페리덴 왕조의 쿠미-오리 2세 대왕이라고 소개하는 길이가 50㎝ 정도 되는 오이 같기도 하고 호박 같기도 한 물체가 부엌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뾰족한 곳마다 빨간 보석들이 박혀 있는 황금왕관을 쓰고 있으며, 볼프강의 집 지하실, 정확하게는 지하 2층에서 왔다고 했다.
"지하 2층에서 쿠미-오리 대왕은 신하들과, 이제는 더 이상 그의 통치를 받고 싶어하지 않는 쿠미-오리 백성들과 더불어 살고 있었다. 오이 대왕은 신하들과 함께 쿠미-오리들을 끔찍이 위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이대왕은 쿠미-오리들이 배은망덕하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오래전에 지은 집 지하실에는 모두 오이 같기도 하고 호박 같기도 한 쿠미-오리들이 산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오이대왕이 있다는 거였다. 또 오래된 궁전에는 오이황제도 산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쿠미-오리들이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키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거였다."
오이대왕은 볼프강의 집 부엌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러 왔으며, 머지않아 백성들이 자기를 데리러 올 것이므로 자신에게 왕의 대우를 해줄 것을 명령한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오이대왕을 데리러 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가족들 모두 어이없어했지만,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가족 내부에 조금씩 미묘한 기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오이대왕의 등장으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볼프강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오이대왕을 끔찍이 위한다. 오이대왕의 주식인 썩은 감자를 가장 열심히 공급하는 것도 아버지다. 아버지의 방에는 썩은 감자들이 뒹굴고, 아버지와 오이대왕은 침대에서 나란히 동침(!)한다.
오이대왕(가족들은 오이덩어리라고 부른다)의 처치를 둘러싸고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 간의 갈등이 커지자, 볼프강은 지하 2층에 쿠미-오리들이 살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흙덩어리 안쪽 그들의 은신처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 쿠미-오리 대왕과 닮았지만 오이 같은 녹색이 아니라 감자 같은 짙은 갈색이었다. 그들은 오이대왕의 기대와는 달리, 그가 없는 지금 무척 행복해 보인다. 쿠미-오리 대왕을 모시고 있었을 때는 날마다 오이대왕을 위한 커다란 궁전을 지어야만 했지만, 지금은 새끼들을 위해 학교와 회의실과 체육관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다. 그들은 대왕만을 위해 살아오는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닉의 모래놀이 장난감들이다. 장난감 포클레인과 트럭들을 가지고 그들은 여러 가지 유용한 것들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오이대왕의 출현으로 표면에 드러나게 된 가족 간의 갈등은 아버지의 가출로 정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은 결국 어린 닉의 단순하지만 용기 있는 행동으로 해결된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인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다른 책들로는 '깡통소년' '머릿속의 난쟁이' '언니가 가출했다' '그 개가 온다' 등이 있다. 기발한 상상력과 허를 찌르는 유머에다,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권위에 도전하는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책 읽는 재미를 담뿍 느낄 수 있다.
용학도서관 관장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