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경북 영천의 한 임대아파트. 싱크대는 깨끗했고 거실 바닥은 반질반질 윤이 났다.
권오수(가명'49) 씨의 아파트는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이틀에 한 번은 꼭 청소해요. 놀아서 뭐합니까. 허허…." 권 씨의 환한 얼굴을 보면 환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권 씨는 골수 조직이 지방으로 바뀌면서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이 감소하는 혈액질환 '재생불량성 빈혈' 환자다.
◆온몸이 멍투성이
"이 약은 몸에 쌓인 철분을 빼는 약이에요."
기자와 마주앉은 권 씨는 식탁에 놓인 약 봉투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권 씨는 "한 달에 두 번씩 남의 피를 수혈하는데 약을 먹지 않으면 몸 속에 철분이 계속 쌓여 당뇨를 비롯한 합병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권 씨는 수혈하는 것을 '남의 피를 빌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 권 씨는 피를 빚지고 사는 사람이다.
2004년 11월 조립식 건물공사 일을 했던 그는 퇴근 뒤 동료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일이 잦았다. 몸이 피곤한 것도 몸으로 때우는 고된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넘기다 어느 날 아침 피를 토하는 바람에 병원을 찾게 됐다. 베개와 이불이 붉게 물들었고 피가 섞인 변까지 나왔다. 순간 정신을 잃고 119에 실려 병원으로 간 그는 며칠 뒤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권 씨는 '머리가 어지러운 병'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병원을 떠났다.
하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병이었다. 병원에서는 나중에 골수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잇몸으로 피가 철철 새고 수시로 코피가 터졌다. 몸에 멍이 들면 일주일 넘게 사라지지 않았다. "옛날 어른들이 '피 말라 죽는 병'이라고 하던 게 꼭 이 병이 아닌가 싶어요. 그 병에 내가 걸렸네요." 권 씨는 바짓자락을 걷어 다리에 생긴 좁쌀 같은 붉은 반점을 보여줬다. "혈소판 수치가 줄어서 다리가 이렇게 됐어요."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무일푼으로 경북 영천에
그에게 경남 마산은 아픈 기억만 가득한 도시였다. 17년 넘게 삶을 일궜던 마산을 떠나 10년 전 영천으로 왔다. 1998년 아내와 이혼했고, 지인과 함께 꾸렸던 자동차부품회사까지 망해 1년 만에 투자금 5천만원을 날렸다.
"그냥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어요. 친한 친구놈이 영천에서 패널 공장을 운영한다기에 그 밑에 들어가서 일하면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지 싶었습니다."
권 씨는 공장 기숙사에 터를 잡았다. 두 아들은 아내가 키우는 것으로 합의했기에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고독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헤어진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받았다. 아내는 "애들 외할머니가 자궁암에 걸려서 아이들을 돌보기 어려울 것 같다"며 두 아이를 영천으로 보냈다. 그리고 3년 뒤 장모가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둘째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영천에 왔다. 권 씨네 집은 공장 기숙사였다. 아이들은 몇 명 안 되는 공장 사람들과 부대끼며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2007년 임대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권 씨 가족은 불안한 삶을 이어갔다.
◆"애들한테 항상 미안해"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인 둘째 혁민(가명'17)이는 국가대표 태권도 선수가 꿈이다. 1차 목표는 오는 10월 있을 전국체전에서 경북 태권도 대표가 되는 것. 얼마 전 경북 대표를 뽑는 예선을 통과해 다음 경기를 기다리고 있다. 운동하는 아이들은 부모 손길이 많이 필요한데 제대로 뒷바라지하지 못하는 권 씨는 미안하기만 하다. 경기가 있을 때마다 부모가 신경 써야 하며 제대로 된 음식도 챙겨줘야 한다. 기숙사비와 각종 간식비, 경기 참가비며 이리저리 나가는 돈이 많다.
첫째 혁수(가명'20) 씨는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나중에 군대 갔다 와서 돈 벌어 대학에 가겠다"며 지금은 구미 공장일을 관두고 PC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권 씨는 "아이들이 엄마 없이도 씩씩하게 잘 자라줘서 다행이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혁수한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라도 꼭 대학에 가라고 했건만 부담이 됐는지 결국 안 가더라"며 고개를 숙였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권 씨는 매달 생계급여 90여만원을 받고 있다. 이 돈으로 혁민이 학교도 보내고, 병원에 가고, 미래도 준비해야 한다. 권 씨는 기초생활수급자 제도가 있는 것을 2008년에 처음 알고 생계비 지원을 받았다. 그는 얼마 전 조직이 일치하는 골수 기증자를 찾았다. 문제는 또 돈이다.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에 골수 기증자의 입원비와 이식비 등 900여만원을 보내야 수술을 할 수 있다. 돈 때문에 수술은 꿈도 꾸지 않았다는 권 씨의 가슴이 또다시 먹먹해졌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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